세입자 보증금으로 세운 ‘부동산 왕국’...전세사기 또 터진다
  • 정락인 언론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1.04 12:05
  • 호수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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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인천·대전·청주에 이어 수원에서 발생한 1200억원 규모 전세사기 사건

전국에 휘몰아치고 있는 ‘전세사기’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한 남성의 죽음 때문이었다. 지난해 10월12일 오전, 서울 종로구의 한 모텔에서 40대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된다. 그는 이 모텔에서 두 달 넘게 지내던 장기 투숙자였다. 사망 원인은 ‘상세 불명의 질병에 따른 병사’로 나왔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이 남성의 신원을 확인하고 깜짝 놀란다. 그는 전세사기를 저지르고 경찰의 추적을 받던 빌라왕 김아무개씨(42)였다.

김씨는 1000채가 넘는 빌라를 소유해 ‘천 빌라’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고급 외제차를 몰며 유흥업소에 드나들던 그는 지난해 초 부동산 경기가 급격히 침체되면서 내리막길을 걷는다. 급기야 세금을 체납하고, 세입자들의 보증금 반환 요구가 빗발치자 잠적했다. 이런 그가 모텔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전세사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씨는 서울과 인천 지역에 빌라 등 무려 1500채의 주택을 가지고 있었다. 피해자만 1669명, 피해금액은 3280억원에 이른다. 김씨가 사망하면서 보증금 반환을 손꼽아 기다리던 세입자들의 실낱같은 희망도 한꺼번에 무너졌다.

김씨가 쏘아올린 전세사기 신호탄은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터진다. 서울 강서구는 ‘세 모녀 전세사기’로 술렁였다. 김아무개씨(여)는 2017년부터 두 딸 명의로 강서구·관악구 등에서 빌라 500여 채를 매입했다. 세 모녀는 ‘무자본 갭투자’(자기자본 투입 없이 전세보증금을 이용해 주택을 구매) 방식을 악용해 세입자 85명의 보증금 183억원을 가로챘다.

서울·인천·대전·청주에 이어 1200억원 규모의 수원 전세사기가 터졌다. ⓒ시사저널 최준필
서울·인천·대전·청주에 이어 1200억원 규모의 수원 전세사기가 터졌다. ⓒ시사저널 최준필

쇼핑하듯 건물 매입…한 골목에만 8채

빌라가 밀집해 있는 화곡동에도 빌라왕이 있었다. 강아무개씨(55)는 무자본으로 화곡동 일대 283채의 빌라를 매입하고 임대했다. 그는 공인중개사 등과 공모해 건축주로부터 1채당 평균 500만~1500만원의 리베이트를 받은 후 세입자들의 전세금을 가로챘다. 지금까지 피해자는 18명, 피해액은 31억6800만원이지만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인천 미추홀구에서는 ‘건축왕’ 사건이 터진다. 건축업자 남아무개씨(62)가 공인중개사 등과 짜고 공동주택 2700여 채의 세입자 533명에게 전세보증금 약 430억원을 받아 가로챈 것이다. 남씨 등은 2021년 3월부터 미추홀구 일대 아파트와 빌라 등을 집중 사들이면서 피해자를 양산했다. 인천 전세사기 피해자 4명은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울과 인천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대전, 청주, 수원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한다. 특히 수원의 전세사기는 기존의 사건과는 차원이 다르다. 수원에서 부동산 큰손으로 불린 정아무개씨(59)는 일가족과 친인척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인중개사 등과 함께 조직적으로 범행에 나선 것으로 파악됐다. 정씨는 팔달구 인계동에 7층짜리 다세대주택을 매입하면서 임대시장에 본격 뛰어든다. 이후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건물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기존에 매입한 다세대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 또 다른 주택을 매입했다. 2020년부터는 법인을 설립한 뒤 기업형으로 나선다. 18개 법인을 세워 대규모로 임대사업을 벌였다. 직접 건축업자를 끼고 건물을 세우기까지 했다.

이런 식으로 정씨 일가가 소유한 건물은 확인된 것만 50여 채에 달한다. 한 골목에만 정씨 일가 소유 건물이 8채나 있을 정도다. 쇼핑하듯 건물을 매입하면서 약 700억원대 부채가 발생했다.

정씨는 부동산 외에도 햄버거 가게, 베이커리, 카페를 내면서 사업을 확장했다. 경기 양평·평택, 강원 강릉·양양, 제주 등지에도 땅을 사거나 건물을 매입했다. 세입자들의 보증금으로 ‘부동산 왕국’을 세운 것이다.

정씨는 가족과 친인척에게 임대사업의 핵심 역할을 맡겼다. 그의 아들은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하며 아버지 소유 건물들의 임대차 계약을 직접 중개했다. 정씨의 개인비서와 처남도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내고 건물 중개를 담당했다. 예비 며느리는 사무실에서 회계 등의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모래성 같은 정씨의 부동산 왕국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지난해부터 종합부동산세와 지방세 부담이 커지면서 정씨의 목을 조여왔다. 부동산 경기 침체와 전세시장 악화로 이전처럼 세입자도 끌어모으기 힘든 상황이 됐다.

자금줄이 끊기기 시작했고, 현금이 부족해 유동성 위기가 찾아온다. 지방세를 체납하면서 가압류가 시작됐고, 세입자들의 보증금을 줄 수 없게 되자 잠적한다. 정씨는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도망가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쳤다.

수원 전세사기 피해 규모는 지금도 계속 불어나고 있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수원대책위원회는 이 사건 임대인인 정씨 일가의 개인·법인 소유 건물이 52개(수원 44개, 화성 6개, 용인 1개, 양평 1개)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들 건물에서 세대수가 파악된 건물은 40개 건물의 721세대로, 예상 피해액은 123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건물이 추가로 나올 수 있어 피해 규모는 더 커질 전망이다. 경찰은 임대인인 정씨 부부와 아들, 이들 건물을 중개한 공인중개사 18명 등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이고 있다.

10월17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의 한 다세대주택 앞에서 ‘수원 전세사기 의혹’ 사건의 피의자인 정아무개씨가 세입자들을 피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깡통주택 20만 가구…전세보증금 26조원

지금 터지고 있는 전세사기는 시작에 불과하다. 주택담보대출과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을 합친 금액이 집의 실제 매매가에 가깝거나(대략 80% 이상) 더 높은 경우를 ‘깡통주택’이라고 한다. 집을 팔더라도 집주인이 별다른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문제는 전국에 부채비율이 80%를 넘는 깡통주택이 20만 가구에 이르고 전세보증금만 26조원이 넘는다는 사실이다. 건물을 대량 소유한 집주인 다수는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건물을 매입한 임대사업자다.

실제 전체 보증 사고 가운데 부채비율이 90%를 초과하는 경우 사고 금액도 2018년 232억원에서 올해 1조3000억여 원으로 58배나 급증했다. 사고 비중도 29%에서 올해 75%까지 증가했다.

현재 깡통주택은 서울, 전남, 부산, 경기 순으로 많다. 서울에서는 강서구가 가장 많고 영등포, 송파, 강동, 금천이 뒤를 이었다. 부산에도 깡통주택이 2만 가구를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 지역에서는 언제든지 대규모 전세사기가 일어날 수 있다. 전국 곳곳에 ‘전세사기 시한폭탄’이 설치돼 있는 것과 같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뒷짐 지고 사건이 드러나기를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피해자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사후 약방문’이 아니라 예방이 최선책이다. 전문가들도 제2, 제3의 전세사기 예방을 위해서는 정부의 선제적인 조치가 시급하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허영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은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발생한 전세사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확인됐다”며 “정부는 깡통주택 위험도가 높은 지역에 대해 전세사기 재발 방지는 물론 민생경제 안정을 위해 선제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가 10월22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의회에서 열린 ‘수원 전세사기 피해 청취 간담회’에서 참석자들과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갈수록 고도화되는 사기 수법…꼼꼼한 확인이 최선의 예방책

전세사기의 시작은 무자본 갭투자다. 임대업자들은 자기자본을 투자하지 않고 전세보증금을 종잣돈으로 삼아 건물을 사들이거나 신축한다. 이걸 담보로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기 때문에 많은 근저당이 설정돼 있다. 세입자의 보증금 반환은 새 세입자로부터 받은 보증금으로 돌려 막는다. 이때 집값 하락 등으로 건물 가치나 전세가가 떨어지면 위험한 징조가 나타난다. 집주인의 체납 문제가 불거지면서 보증금을 돌려줄 여력이 없어져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사기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세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중개사들과 공모해 덫을 놓는다. 특히 신축빌라의 경우는 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당장 시세 확인이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임대업자는 공인중개사와 짜고 전세보증금을 매매가보다 높게 책정해 사기를 친다.

건축주가 직접 임대사업을 하는 것처럼 꾸미고 높은 가격에 세입자를 들인 다음 제3자에게 매각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거나 집주인의 세금 체납 등의 이유로 빌라가 압류되면 세입자는 전세금을 돌려받기 어렵게 된다.

전세와 매매를 동시에 진행하는 ‘동시계약진행’ 수법도 있다. 세입자에게 매매가를 웃도는 전세가를 받고, 임대인은 곧바로 그 돈으로 매매대금을 치러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선순위 보증금을 허위 고지해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공인중개사가 부동산업자와 공모해 ‘깡통전세’ 물건을 ‘안전한 물건’이라거나 ‘보증금을 온전히 돌려받을 수 있다’고 속여 계약을 체결하게 한다. 하나의 주택을 두고 임대인과 임차인이 서로 다른 내용의 임대차 계약을 맺는 ‘이중계약’도 조심해야 한다.

임차인 입장에서 최선의 예방책은 ‘꼼꼼한 확인’이다. 부동산 계약 시 중개사의 말만 믿고 고개를 끄덕이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면 위험이 뒤따를 수 있다.

전세계약 시 먼저 부동산 등기부등본상의 주택 소유자와 집주인이 맞는지 봐야 한다. 이를 위해 집주인의 신분증이나 인감증명서를 확인하고, 전세계약을 한 후에는 등기를 떼어 명의 변경 여부도 살펴야 한다.

세금 체납을 확인하는 것도 필수다. 공인중개사를 통해 집주인의 동의를 얻어 국세, 지방세 체납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체납액이 많은 경우 계약에 신중해야 한다. 근저당 금액이 많으면 집이 경매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은 부동산 계약은 발품 팔고, 손품 팔고, 꼼꼼히 확인하면 그만큼 좋은 물건, 안전한 물건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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