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통령 취임해도 ‘혼란의 아르헨티나’는 당분간 계속된다
  • 정덕주 남미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2.10 08:05
  • 호수 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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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우려 속에 취임하는 밀레이 대통령, “인플레이션 종식 위한 돈줄 조이기” 강력 시사
집권여당 10% 소수 의석과 좌파 단체들의 반정부 시위 등 난제 맞닥뜨려

11월19일 결선투표를 통해 아르헨티나 국민은 ‘괴짜 극우’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를 4년 임기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2월10일 취임을 앞둔 밀레이 당선인에 대해 한 컨설팅 회사의 설문조사에 응답한 국민들은 ‘희망과 우려’라는 상반된 두 단어를 선택했다. 응답자 중 71%는 ‘현 정권의 무능함에 실망해 밀레이에 투표했다’며 최근 현지에서 만들어진 신조어 ‘페널티 투표’의 건재함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물론 이들은 인플레이션 종식과 공기업 민영화가 대통령 취임 즉시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40% 이상이 내년에 인플레이션이 현재에 비해 감소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기대감을 보여주었다.

아웃사이더 극우 경제학자인 밀레이의 대통령 당선에 대해 많은 아르헨티나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언론들이 놀라워했다. 그의 당선을 이끈 주된 요인에 대해 현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11월16일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선후보가 자신의 얼굴로 장식된 100달러 모조 지폐를 들고 선거유세를 하고 있다. 극우 성향의 밀레이 후보는 11월19일 대선 결선투표에서 당선됐다. ⓒAFP 연합

‘연예인 경제학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

첫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로 인한 만성적인 경제위기, 재정적자 그리고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국민을 실망으로 몰아넣었다. 둘째,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도 하락도 한몫했다. 이에 때맞춰 밀레이는 2018년부터 TV 정치 풍자 버라이어티에 출연하며 ‘정치인’으로서가 아닌, 당시 정부의 경제정책을 필터 없이 신랄하게 비난하는 ‘연예인 경제학자’로서 인지도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경제학 석사로 쌓은 많은 경제 지식과 강렬한 미디어 노출은 시청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했고, 경제학자에서 정치인으로서의 변신을 이뤄냈다.

셋째, 그는 대선 캠페인 광고에 과도하게 투자하는 대신 영악하게 SNS를 이용해 선거전을 펼쳐 나갔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소수의 젊은 전문가에 의해 관리됐던 SNS 계정을 통해 국민에게 알려졌고, 선거 유세 기간 중에 그의 기행은 SNS에서 늘 이슈를 몰고 다니곤 했다.

넷째, 중도우파인 파트리시아 불리치(대선후보 3위, 전 보안부 장관), 역시 중도우파인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과의 연합은 큰 효과를 보았다. 결국 이들의 동맹은 지난 결선투표에서 많은 중도우파 성향의 유권자 표를 밀레이에게 몰아주었다. 이에 보답하듯 밀레이는 자신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은 불리치를 보안부 장관으로 내정했다.

다섯째, 2012년 ‘청년 투표권 법(Voto Joven)’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정권 시절에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성인(만 18세 이상)이 아닌 만 16~18세 청년들도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페르난데스 정권이 재임을 위해 성인이 아닌 청년들의 코 묻은 투표권을 노리고 제정한 법안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11년 후 이 법안은 오히려 극우 괴짜 경제학자인 밀레이가 대통령에 선출되는 데 더 큰 효력을 보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의 파격적인 대선 공약들이 유권자 중 가장 젊은 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고, 기존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나라와 자신들의 미래에 변화를 기대하는 청년들은 결선투표에서 그에게 많은 표를 투척했다.

밀레이 대통령 당선인은 11월26일 미국을 방문했다. 취임 전 방문이기에 사적 방문이란 표현을 썼지만, 전세기를 빌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자신의 오른팔 역할을 한 여동생 카리나 밀레이와 재무장관에 내정된 루이스 카푸토 등 가까운 참모진을 대동했다. 이틀간의 짧은 일정에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만났고,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만났다. 아르헨티나 언론들은 이번 방미에 대해 아르헨티나의 차기 대통령이 미국과의 관계를 도모하고 해외 자금 조달을 모색하려는 목적이 숨어있다고 보고 있다.

이제 미국에서 돌아온 밀레이 신임 대통령은 경제·정치·사회적 난제들을 12월10일 취임과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 가장 먼저 만성적인 경제위기 탈출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 퇴임하는 페르난데스 정권은 거시경제를 초인플레이션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연간 140%가 넘는 인플레이션과 이를 못 따라가는 임금 탓에 인구의 40%가 빈민층이다. 또한 국내총생산(GDP·2023년 6411억 달러)의 15%에 달하는 엄청난 재정적자를 밀레이 정권에 물려주고 떠난다.

이 중 중앙은행 재정적자의 가장 큰 문제는 2018년 마크리 정부에서 발행한 고금리 단기 채권 ‘렐리크(LELIQ)’다. 당시 중앙은행은 민간용이 아닌 금융권용으로 렐리크를 찍어 무분별한 페소(아르헨티나 화폐) 발행이 초래한 과도한 유동성을 흡수하려 했다. 예를 들어 렐리크의 연 환산 금리는 약 133~155%다. 중앙은행은 2018년부터 채권을 가진 은행에 높은 금리를 지급해 오고 있는 것이다. 금융권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아르헨티나에는 통화량(약 80억 페소)의 3배에 달하는 렐리크가 발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렐리크에 묶인 돈이 시장에 쏟아지면 통화량은 현재의 4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기에 밀레이 신임 대통령은 ‘렐리크 시한폭탄’이라며 그 해결 방안을 급선무로 모색하고 있다.

최근 현지 라디오 인터뷰에서 ‘취임 후 가장 먼저 어떤 경제정책을 펼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신임 대통령으로서 입장을 최초로 밝혔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2011년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에 있다. 취임 초기에 재정 긴축을 더 하게 될 것이며, 스태그플레이션은 아마도 더 심해질 것이다”라며 첫 경제정책이 인플레이션 종식을 위한 돈줄 조이기임을 시사했다.

 

GDP의 15% 엄청난 재정적자 물려받아

신임 대통령은 경제적 위기를 타파하는 동시에 정치적인 자기 세력 구축에도 힘써야 한다. 현재 그가 창립한 ‘자유전진당’은 의회 전체 의석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소수 의석을 보유하고 있다. 파격적인 대선 공약들을 이행하고 경제 및 국가 개혁법을 통과시키려면 국회(상·하원)에서 반수 이상의 표를 얻어내야 한다. 이미 대통령 당선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중도우파 진영인 마크리·불리치와는 동맹을 맺었다. 이젠 중도좌파 성향인 페론주의자들에게도 손을 내밀어 자신의 정치 세력 구축에 더욱더 힘써야 한다. 또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취임 직후인 12월19일과 20일에는 좌파를 지지하고 우파인 밀레이 정부를 반대하는 거대 노조들의 시위가 예정되어 있다.

‘아르헨티나 재건’을 외치는 밀레이 정부는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인 만성적 경제위기 타파라는 문제를 떠안은 채 향후 의회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해 어떤 동맹을 맺을지, 공공지출은 또 어떻게 축소해 나갈지, 그로 인한 소요 사태에는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지 등 수많은 난제를 만나게 된다. 따라서 새 정부가 출범해도 ‘혼란의 아르헨티나’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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