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후진’ 사회의 비극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2.18 08:05
  • 호수 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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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8일 늦은 밤, 국제박람회기구 총회에서 공개된 부산엑스포 홍보 영상을 지켜보며 맨 먼저 든 느낌은 “어, 이건 아닌데”라는 안타까움이었다. 영상에는 부산의 진면목을 알리는 내용은 거의 없이 유명 인사들이 연달아 외치는 ‘당신의 선택(Your Choice)’ 같은 구호만 요란했다. 부산엑스포 유치전은 그렇게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총회 투표 결과는 다 아는 대로 119대 29의 참패. 유치 실패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꼽히지만, 이 무성의하고 무감각한 홍보 영상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터다. 특히 2012년에 큰 인기를 얻었던 노래 《강남스타일》의 때아닌 강림은 많은 사람을 경악케 했다. “언제 적 강남스타일이냐” “아이돌과 연예인으로 도배한 것은 무슨 생각인가? 시작도 하기 전에 진 게임이었다”라는 반응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귀결. 그 영상이 말해주듯 유치전에 임한 한국 측의 상상력은 너무나 빤하고 구태의연했다. 그야말로 “지금이 어느 때인데”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는 비판의 근원까지 굳이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이 빤하고 구태의연한 모습을 넘어 뒷걸음질까지 하고 있다는 낌새는 불길하게도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민생 사정도 예외는 아니다. 가파른 물가 상승 탓에 올해 들어 3분기까지의 근로자 월평균 실질임금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2% 낮아졌다. 실질임금의 하락은 국민 다수의 생계와 직결된 문제라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후퇴’다. 이런 흐름이라면 경제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

ⓒ시사저널 최준필
더불어민주당내 혁신(비명)계 의원 모임 '원칙과 상식' 조응천, 윤영찬, 이원욱, 김종민 의원(아래 왼쪽 두번째부터)이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국민과 함께 토크쇼'를 개최, 지지 당원들을 함께 '공약준수, 병립형 회기저지' 등의 피켓을 든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시사저널 최준필

정치는 또 어떤가. 제1야당 대표가 현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과거의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회귀할 것을 시사하는 발언을 내놓은 이후 선거제도와 관련한 논란이 뜨겁게 이는 것도 심상치 않다. 선거제도의 퇴행은 곧 정치의 퇴행이라는 점에서 그냥 넘기기 어려운 문제다. 한 걸음 한 걸음 더디게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정치가 전진이나 정지도 아닌 후진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게 된다.

말로는 수없이 과학기술의 발전을 외치던 정부가 그 밑거름이 될 국가 R&D(연구개발) 예산을 깎은 것 또한 불안하다. 정부는 ‘R&D 카르텔’을 걷어내고 국가전략사업에 집중 투자하기 위해 연구 예산을 재조정하겠다며 33년 만에 처음으로 국가 R&D 예산을 삭감했다. 그에 따라 국내 연구 현장에서는 기초과학 연구가 위축되고 연구원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빗발쳤다. 국가 발전의 중요 기틀인 기초과학이 힘을 잃고 비틀거리게 되면 과학기술의 동력 또한 쇠퇴할 가능성이 크다. 국가적 퇴행은 환경과 체육계에서도 덩달아 나타난다. 환경부가 환경 보호를 위해 식품접객업 등에서 퇴출시키기로 했던 일회용 종이컵·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연장해주겠다고 발표함에 따라 현 정부가 국정과제로 제시했던 ‘일회용품 사용량 감축’ 정책은 제자리에서 멈췄다. 이에 더해 대한체육회는 구시대적 방식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던 국가대표 선수단의 해병대 입소 훈련을 재개하겠다고 해 빈축을 사고 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말도 있지만 한 국가의 일보 후퇴는 자칫 빠르게 변화하는 국제사회에서 한순간에 경쟁력을 잃게 하는 나비 효과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자동차 운전이 그렇듯 섣부른 후진은 큰 위험을 부르기 십상이고, 뒤로 돌려져서 좋을 것은 어쩌면 사람의 나이듦, 즉 노화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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