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한복판의 혈투’ 살인 조폭들의 29년 만의 최후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 정락인 언론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2.23 16:05
  • 호수 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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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유흥가를 차지하기 위한 조폭들의 전쟁…난투극에 보복살인 이어지며 끝없는 칼부림

서울 강남은 유흥업계 최고의 노른자위로 불린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돈이 흘러다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전국의 조직폭력배(조폭)들은 너도나도 강남으로 진출했다. 이름 좀 있다는 조직은 나이트클럽, 룸살롱 등을 통해 강남에 거점을 마련했다. 이렇게 진출한 조폭들은 지하경제의 ‘큰손’으로 불리며 검은돈을 좌지우지했다. 지역 조폭들에게 강남은 ‘전국구 조폭’(전국을 무대로 하는 조폭)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전국 주먹계를 제패했던 조직들도 강남 유흥가를 배경으로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강남 유흥가는 전국 폭력조직들의 각축장이 됐다. 특히 호남 지역 조직들은 강남 중심가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혈투를 벌였다.

서울 삼성동 뉴월드호텔 앞 보복살인 사건을 주도한 ‘대흥동파’ 일당 12명 가운데 6명이 검거돼 1994년 12월13일 오후 강남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1994년 사건 후 해당 호텔 모습 ⓒ뉴시스
범행도구(회칼) 발견 장면 ⓒ뉴시스

호남 신흥 조폭들의 길거리 살인극

1990년 10월 당시 노태우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조직폭력배 일제 소탕에 나선다. 이때 강남 유흥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서방파의 김태촌이 구속된다. 절대강자가 사라지자 이 틈새를 노리고 신흥 조폭들이 강남으로 몰려든다.

서울 서초구 반포4동 팔레스호텔 일대 유흥업소는 영산파(대흥동파)가 이권을 장악했고, 세력 확장을 노린 광주 지역 폭력조직 신양파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영산파는 서울 강서구를 거점으로 한 조직원 50명 규모였고, 신양파는 광주 동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150명 규모의 조직이었다.

1991년 10월7일 오전 1시쯤 신양파 조직원들은 영산파가 관리하는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을 마신 후 마담과 술값 시비를 벌인다. 이때 영산파 조직원들이 끼어들면서 싸움이 시작된다. 신양파 조직원 12명과 영산파 조직원 8명 등 20명은 팔레스호텔 앞 대로에서 낫, 도끼, 회칼을 들고 집단 난투극을 벌였고, 영산파 조직원 최창호가 신양파 박진수가 휘두른 회칼에 옆구리를 찔려 숨진다. 또 신양파 조직원 3명은 영산파가 휘두른 흉기에 가슴 등을 찔려 중상을 입었다.

이들의 싸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영산파는 ‘조직원들이 반대파로부터 공격받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철저히 보복한다’는 행동강령에 따라 ‘피의 보복’을 다짐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94년 11월 박진수가 출소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영산파는 집단 합숙을 하며 칼을 갈기 시작한다.

12월4일 오후 3시쯤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뉴월드호텔(현 라마다호텔)에서 신양파 조직원의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영산파는 박진수가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구체적인 보복 계획을 세운다. 결혼식 당일 영산파 두목 이아무개씨와 행동대장 정동섭 등 조직원 12명은 회칼 등으로 무장하고, 호텔 인근에서 대기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신양파 조직원들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영산파 조직원들은 일제히 회칼을 휘두르며 칼부림을 시작했다. 최우선 타깃은 박진수였다. 영산파 조직원들은 박씨로 보이는 사람을 쫓아가 회칼로 난자했다. 하지만 그는 박진수가 아니었다. 다른 조직원을 박씨로 오인해 살해한 것이었다. 이날 보복으로 신양파 조직원 2명이 죽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범행 직후 영산파 조직원들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승용차 2대에 나눠 타고 달아났다.

경찰은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벌여 영산파 두목, 고문, 조직원 등을 붙잡아 법의 심판대에 넘겼고, 이들에게는 무기징역 등 중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범행에 가담한 정동섭과 서아무개씨 등 2명이 도주하면서 ‘미완의 사건’으로 남았다. 경찰이 추적에 나섰으나 두 사람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었다. 이들은 한동안 수사기관의 감시망을 피해 숨어 지내다 2003년을 전후해 각자 중국으로 밀항한 것으로 파악됐다. 서씨의 경우 전북 군산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밀입국했다. 이들은 현지 공안의 눈을 피해 공장 등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수시로 만남을 가졌고, 심지어 가족을 중국으로 초대해 재회하는 등 대범한 행각을 벌였다. 영산파는 중국을 왕래하며 서씨와 정씨의 도피생활을 적극 지원했다.

피의자 정동섭 전신 및 특징 사진 ⓒ뉴시스

도주하던 행동대장과 조직원의 밀항

국내에 있는 두 사람의 가족들 경조사를 대신 챙겨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두목 이씨에게도 매달 영치금과 가족 생활비 등 명목으로 10년간 484회에 걸쳐 3억2300만원을 지원했다.

지난해 3월 선양에 있는 주중 한국영사관에 한 남성이 나타난다. 도주행각을 벌이던 서씨였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오랜 도피생활에 지쳤다”며 밀항 사실을 자진신고한 후 귀국했다. 서씨는 해경 조사에서 자신의 밀항 일자를 ‘2016년 9월’이라고 속인다. 밀항 시기는 그의 처벌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만일 서씨의 말대로라면 살인죄 공소시효 15년이 완성돼 처벌이 불가능했다. 현행법은 범인이 형사처분을 피할 목적으로 국외로 도피하는 경우 그 기간 동안 공소시효는 정지된다. 서씨가 실제 밀항한 해인 2003년은 사건 발생 15년이 지나지 않은 때여서 공소시효 완성 이전이다. 2015년 7월 형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2001년 8월1일 이후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폐지됐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하면 서씨는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서씨는 밀항 일자를 조작해 살인죄 처벌을 피하겠다는 꼼수를 썼던 것이다.

해경은 서씨의 의도에 말려 들어갔다. 그의 진술대로 밀항 시기를 2016년으로 판단해 밀항단속법 위반 혐의로만 검찰에 불구속 송치했다. 서씨는 쾌재를 부르며 일반 시민들과 섞여 거리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은 서씨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가 처벌을 피하기 위해 밀항 시기를 공소시효 완성 이후로 진술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검찰은 뉴월드호텔 살인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에서 광주지방검찰청으로 이첩했다. 광주지검은 검사와 수사관 등 20여 명으로 전담수사팀을 구성해 전면 재수사에 나섰다. 이를 위해 서씨와 도주 중인 정동섭 등 관련자들에 대한 계좌추적과 통화내역 분석, 압수수색 등 전방위 수사에 돌입한다.

서씨가 국내에 언제까지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각도로 살펴본 결과 1996년 이후 서씨의 행적이 전혀 없었다. 반면 2005년에서 2007년 사이 중국에서 서씨를 봤다는 목격자들이 나타났다. 수감 중인 영산파 조직원들의 교도소 접견 녹취록 등에서도 서씨의 밀항 행적을 엿볼 수 있었다. 검찰은 이렇게 확보한 증거들을 토대로 서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그의 신병 확보에 나섰다. 서씨가 국내에 입국한 지 약 1년이 되는 시점에 검찰 수사관들은 전남 나주 시내의 한 식당에서 그를 체포한 후 구속했다. 당시 서씨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자신의 거주지가 아닌 지인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검찰의 추궁에 서씨는 “처벌을 피하려고 밀항 시점에 대해 거짓말했다”고 자백했다.

검찰은 서씨를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와 밀항단속법 위반 등으로 구속기소했고, 법원은 징역 18년을 선고했다.

이제 도주 중인 정동섭만 잡으면 뉴월드호텔 살인 사건을 끝낼 수 있었다. 검찰은 정씨 행적을 쫓는 데 수사력을 집중했고, 그가 중국이 아닌 국내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정씨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귀국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검찰 수사망 좁혀오자 극단 선택

검찰은 수사망을 좁히며 그를 쫓았지만 도무지 정씨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7월26일 공개수배로 전환하고 정씨의 얼굴 사진과 인적 사항 등을 공개했다. 정씨 입장에서는 대낮에 발가벗겨진 것이나 다름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더 이상의 퇴로도 없었다. 공개수배한 지 16일 만인 8월11일 정씨는 서울 관악구의 한 숙박업소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하루 전날 입실한 정씨가 다음 날 퇴실하지 않자 이를 이상히 여긴 숙박업자가 경찰에 신고했다. 현장에는 외부 침입 흔적이나 시신에 외상은 없었으며, 유서가 발견돼 극단 선택을 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검찰은 정씨에 대해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다. 정씨의 마지막 살인은 바로 자신이었던 셈이다. 이로써 29년간의 길고 길었던 살인 조폭들의 사법처리도 종지부를 찍게 됐다.

 

■완전한 기업형으로 변신하는 조직폭력배들

국내 조직폭력배들은 계속 변신을 모색해 왔다. 조폭들의 변천사를 보면 1세대는 폭력 위주의 ‘갈취형’, 2세대는 ‘갈취형과 기업형의 혼합’, 3세대는 합법으로 위장한 ‘완전한 기업형’이다. 조폭들도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요즘에는 30대 이하 ‘MZ조폭’이 대세다.

기존 지역을 기반으로 한 토종 조폭들과 신흥 조폭들은 너도나도 ‘21세기 기업형 조폭’을 표방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조폭인지 일반 기업체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다. ‘두목’ ‘행동대장’ 등 암흑가에서 부르던 호칭도 버린 지 오래다. 대신 ‘회장’ ‘사장’ ‘영업부장’ 등 기업에서 사용하는 호칭을 사용한다. 번듯한 명함도 가지고 다닌다.

조폭들이 기업형으로 진화하면서 조직 운영도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로펌이나 법조인을 법률 고문이나 자문으로 두면서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 간다. 사업 영역이 넓어지면서 경제적인 여건도 훨씬 좋아졌다. 기존에는 폭력 갈취, 룸살롱이나 오락실 운영 등이 주요 수입원이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3세대 조폭들은 건실한 사업가처럼 활동하면서 합법으로 위장해 탈세, 횡령, 배임 등을 저지르고 있다. 기업사냥꾼이나 사채업자 등과 결탁해 상장사 인수 후 회삿돈을 횡령한 후 부실화시키거나 주가조작에 나서기도 한다.

경찰은 조직 체계를 갖추고 조직 강령이 있으며 자금 능력이 있는 ‘관리 조폭’에 대해선 상시적인 감시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허점이 있다. 신흥 조직이나 소규모 조직들은 명단에서 빠져 있는 경우가 있다. 또 기업형 조폭들은 조직폭력단체로 규정하기가 애매해 ‘폭력조직’으로 분류되지 않을 수도 있다.

‘관리 조폭’ 명단에 빠져 있다고 해서 그들이 암흑가를 떠난 것은 아니다. 상당수는 조직과 끊임없는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등 여전히 서민들의 피를 빨고 있다. 영락없이 ‘양의 탈을 쓴 늑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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