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녹음’ 불가에 엇갈린 시선…“학대 입증 어떻게” vs “신뢰 붕괴”
  • 정윤경 기자 (jungiza@sisajournal.com)
  • 승인 2024.01.1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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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증거 수집에도 ‘진상 학부모’로 낙인찍혀”
교사단체 “몰래 녹음은 교육 신뢰 무너뜨려”

“항상 맛이 가 있다”, “뇌가 어떻게 생겼는지 열어보고 싶다”

2018년 3~5월 서울 광진구의 한 초등학교 담임교사가 교실에서 자신의 3학년 학생에게 한 발언이다. 교사의 ‘아동학대’를 의심한 부모가 아이 가방에 몰래 넣은 녹음기에 이 발언은 고스란히 담겼다. 학부모는 교사를 아동학대로 신고하면서 녹음 파일을 증거로 제출했다. 1·2심은 교사의 발언이 아동학대에 해당한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학부모가 제출한 녹음 파일의 증거 능력을 문제삼았다. 공개되지 않은 대화를 ‘제3자’인 부모가 녹음한 것은 증거가 될 수 없다며 사건을 파기환송 했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몰래 녹음’은 최근 웹툰 작가 주호민씨 아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한 혐의로 기소된 특수교사 재판에서도 최대 쟁점이 된 사안이다. 유치원생이나 특수 아동을 둔 학부모들은 몰래 녹음이 ‘정당한 방어권’이라는 입장인 반면, 교원단체는 ‘사생활 침해’라고 맞서고 있다.

웹툰 작가 주호민씨가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의 특수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 주호민 인스타그램
웹툰 작가 주호민씨가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의 특수교사를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한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 주호민 인스타그램

학부모 “대법이 지옥문 열어” vs 교사 “두 팔 벌려 환영”

학부모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 “아동 관점이 없었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정치하는엄마들은 지난 12일 성명서를 내고 “녹음기를 피해 아동이 작동했는지 양육자가 작동했는지에 따라 아동학대 유무죄 여부가 갈리는 대법원의 판단을 상식적인 국민으로서, 한 사람의 양육자로서 존중할 수 없다”며 “대법원의 잘못된 판결 하나가 말 그대로 지옥문을 열었다”고 비판했다.

초등학교 2학년·4학년 자녀를 둔 박아무개씨는 시사저널과 통화에서 “추후에 학교에서 벌어진 아동학대를 입증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면서 “학부모도 아동학대 의심 정황이 있었기 때문에 녹음기를 들려 보낸 건데 ‘진상 학부모’로 낙인찍히는 상황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또 “열린 마음으로 교사들과 소통하는 게 양육자로서 바라는 점이지만 학교는 굉장히 방어적인 존재”라면서 “아동학대 신고를 받으면 사건을 덮으려 한다던가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반면 교사들은 이번 판결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입장이다.

황봄이 경기교사노조 국장은 “30명 가량 아이들을 교육하다 보면 분명 훈육을 하는 일도 생긴다”면서 “녹음 파일은 훈육의 맥락을 무시하고 단편적인 부분만 부각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아동학대 의심 정황이 있을 때는 교사나 학교 측에 직접 소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국장은 “학부모가 아동으로부터 아동학대 의심 정황을 듣게 되면 교사를 무작정 의심하기보다는 교사와 터놓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교사 동의 없이 불법으로 녹음하는 방식은 교육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밝혔다.

초등학교에서 특수교사로 재직 중인 정원화씨도 “‘정당한 방어권’이라는 게 누가 누군가를 공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말이 안 된다”면서 “사소한 것 하나라도 궁금한 점이 있으면 학교로 직접 연락을 해서 오해가 생기기 전에 상담을 신청해 달라”고 당부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모습 ⓒ 연합뉴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모습 ⓒ 연합뉴스

‘불법녹음’은 증거 능력 안돼…“학교와 직접 소통해야”

대법원은 ‘통신비밀보호법’에 의거해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 대화를 녹음한 경우 재판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정은영 대법원 공보연구관은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발언은 공개되지 않은 대화로 볼 수 있다”면서 “학부모가 아이의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서 녹음한 것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한 것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학대를 의심한 학부모가 아이 소지품에 몰래 녹음기를 넣었다면 증거 능력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몰래 녹음한 것이 증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교사들이 함부로 언행을 하는 등 잘못된 교육 활동을 해도 된다는 건 아니”라면서 “학부모가 아동 학대가 의심될 때는 제3자인 학교를 통해서 개인 상담을 요청하는 방법이 타당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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