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깍째깍’ 시중은행 ELS 시한폭탄 터진다
  • 김경수 기자 (2ks@sisajournal.com)
  • 승인 2024.01.19 08:05
  • 호수 1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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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말 믿었다가 노후 자금 모두 다 날렸다”
19조원대 홍콩發 ELS 손실 ‘후폭풍’ 본격화

홍콩항셍중국기업지수(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의 만기가 이달부터 시작됐다. 통상적으로 홍콩H지수 ELS는 가입 후 3년이 만기다. H지수가 가입 당시의 70%를 넘기면 원금과 이자를 모두 받는다. 반대로 70% 밑으로 떨어지면 하락률만큼 원금 손실이 발생한다. 초고위험 파생상품이다.

2021년 초까지만 해도 홍콩H지수는 1만~1만5000포인트로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2022년 하반기로 넘어가면서 4919포인트까지 크게 떨어졌다. 2005년 이후 역대 최저치다. 미·중 무역 갈등, 코로나19에 따른 중국의 봉쇄 정책,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따른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원인으로 꼽힌다. 현재 홍콩H지수는 5000포인트를 오르내리고 있다. 2021년 고점과 비교하면 최대 3분의 1 토막이 났다. 올 상반기에도 홍콩H지수의 부진이 이어진다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NH농협·우리)에서 판매한 ELS 원금 손실 규모는 5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금융권은 우려하고 있다.

ⓒ일러스트 김세중
ⓒ일러스트 김세중

투자자 절규…65세 이상 고령층 피해 심각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국내 금융권의 홍콩H지수 ELS 총 판매잔액은 19조3000억원이다. 이 중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ELS 규모는 전체 잔액의 79.6%인 15조4000억원이다. 1월8일 이후 확정된 원금 손실률은 48~52% 수준이다. 5대 은행의 ELS 상품에서 발생한 손실액이 벌써 1000억원을 넘었다. 수많은 투자자가 수조원대 피해를 떠안을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눈덩이 손실이 확정되자 투자자들의 탄식이 커지고 있다.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최근 금감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작년 11월까지 5대 은행은 H지수에 연계한 ELS 편입 ELT(주가연계신탁)·ELF(주가연계펀드) 상품을 총 14조6482억원어치 판매했다. 고객 수는 무려 15만4359명이다. 건수는 23만1235건에 달한다. 엎친 데 덮쳤다. 평생 모은 노후 자금을 투자한 65세 이상 고령층의 피해가 심각하다. 이들의 투자액은 전체 잔액의 30.5%인 5조4000억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70대 이상은 1만6359명(8.9%)이나 된다. 액수로 따지면 무려 2조원이다. 90대 초고령도 22명이 포함됐다. 전체 잔액은 90억8000만원에 이른다.

윤택한 노년을 꿈꾼 이들. 은행 권유로 노후 자금을 투자했다가, 전 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이들은 원금의 절반 이상을 손실로 감당해야 한다. 인천 부평에 거주하는 김아무개씨(73)가 그렇다. 김씨는 2년 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면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중견기업에서 정년퇴직한 그는 십여 년 전, 퇴직금을 받고 집을 전세 놓으면서 3억원의 목돈을 마련했다. 2021년 3월, 예금에 가입하기 위해 주거래은행을 찾았다. 창구에서 맞이한 직원은 김씨에게 예금 가입을 만류한 후 VIP실로 안내했다. 예금 상품에 목돈을 넣어봤자 금리가 1%도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 직원은 김씨에게 “중국의 엄청난 성장세에 따른 연 4% 이상 이자를 받을 수 있는 ELS가 (예금보다) 훨씬 낫지 않겠느냐”면서 홍콩H지수 ELS 상품 가입을 강하게 권유했다.

직원의 설명에 투자 위험성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그러나 김씨는 직원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별 의심 없이 서명과 녹취에 응하며 가입을 완료했다. 이후 3년이 지났다. 결과는 어떨까. 4% 이익은커녕, 원금이 반 토막 나면서 김씨는 재산의 절반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가입 당시 홍콩H지수는 1만1800포인트 수준이었지만, 1월18일 기준 5100포인트다. 김씨가 원금을 지키려면 오는 3월까지 홍콩H지수가 8000포인트를 넘겨줘야 하지만,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김씨는 “ELS와 같이 매우 위험한 상품에 가입할 때는 우선 면담과 질문을 통해 가입에 적합한지 확인해야 하는데, 실제 면담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투자자 성향 분석도 본인에게 해당되지 않는 다른 위험 항목에 체크하는 등 직원이 올바르게 작성하지도 않았다”며 “가족들은 지금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얼굴 볼 낯이 없다. 안 좋은 생각이 들 때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박아무개씨(68·서울 마포구)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박씨는 2021년 1월12일 은행 직원의 권유로 홍콩H지수 ELS에 2억원을 투자했다. 박씨는 직원에게 “무조건 안전한 상품으로 추천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럴 때마다 직원은 “홍콩H지수 ELS가 이익률도 높고, 무엇보다 G2 국가인 중국은 위험하지 않다”면서 가입을 재촉했다. 박씨 또한 직원으로부터 상품을 안내받을 때 고위험성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최근 ELS 만기를 맞은 박씨는 은행으로부터 반 토막 난 금액을 받고 망연자실했다. 노후 자금 절반을 날린 박씨는 “아는 것도 하나 없이 무작정 상품에 가입한 나 자신이 정말 한심하다”면서도 “은행 직원으로부터 고위험성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이율이나 장점 등만 부각시켜 설명하니 결국 넘어가 서명하게 됐다”며 한탄했다.

은행권의 생각은 이들과 다르다. 고령층이라 해도 ELS 투자 경험이 있는 고객이 90% 이상이라고 설명한다. 단순히 은행권의 불완전판매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ELS 고객은 대부분 신규가 아니다. 오래전에 가입했던 고객이 상품을 유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은행 입장에서는) 70대 이상 고령 고객의 가입은 반기지 않는다. 특히 90대 이상 초고령 신규 가입자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 더욱 투자를 만류한다. 투자 경험이 있는 이들이 고령이라는 이유로 손실을 배상하라는 것은 투자자의 ‘자기책임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피해 구제 위해 발 벗고 나선 금감원

이러한 논란 속에 ELS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였다. 네이버 카페에는 ‘홍콩H지수 관련 ELS 가입자 모임’이 만들어졌다. 1월18일 기준 3200명이 이 카페에 가입했다. 등록된 피해 사례는 1700건이지만,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이들은 지난해 12월15일에 이어 1월19일 오후 1시 금감원 앞에서 은행권의 홍콩H지수 ELS 불완전판매를 규탄하는 집회를 갖는다.

ELS 투자 손실이 가시화하자 금융당국이 팔을 걷어붙였다. 금융감독원(금감원)은 시중은행들이 홍콩H지수 ELS 상품을 판매할 당시 투자자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했는지, 적정 등급 상품을 판매했는지, 상품 위험성을 고객에게 충분히 설명했는지 등 불완전판매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금감원은 ELS 주요 판매사 12곳에 대한 현장 점검과 민원조사에 착수했다. 금감원은 고객을 상대로 단기 실적을 노린 무리한 판매나 불완전판매는 없었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은행은 지수 변동성이 30% 이상이면 ELS 상품 판매 목표금액의 50%만 판매한다는 기존 규정을 80%로 무리하게 바꾸는 ‘영업 우선 정책’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됐다.

금감원은 70대 이상 고령층에게 고위험 상품을 권유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검토 대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해 11월29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에서 열린 ‘금감원-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 간담회’에서 이복현 금감원장은 “은행이 자필 자서를 받고, 녹취를 확보했다는 등의 소비자 피해 예방을 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기 면피 조치로밖에 안 보인다”면서 “솔직히 (저도) 수십 장짜리 설명서를 보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설명 여부를 떠나 고령 투자자에게 수십 퍼센트의 원금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상품을 권유하는 것 자체가 적정했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23년 12월15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홍콩지수 ELS 피해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ELS 사태 핵심 키워드는 ‘금소법’

이처럼 금융 당국에서는 판매사의 홍콩H지수 ELS 불완전판매가 입증될 경우, 판매사가 손실액 일부를 배상해야 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금융 당국 검사는 ‘반쪽짜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함께 나온다. 현재 손실이 확정된 상품들은 3년 전인 2021년 1월에 판매된 것들인데,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은 그해 3월25일부터 시행됐기 때문이다. 불완전판매 정황이 뚜렷해도 금소법 위반을 이유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금소법이 규정한 판매사의 손해배상책임, 적합·적정성 원칙 등 6대 판매원칙 위배 사항도 물을 수 없다. ‘고령 투자자’의 기준도 금소법이 시행되면서부터 기존 70세에서 65세로 하향됐다. 2021년 3월말 이전에 65~69세였던 고령 투자자는 당시 법을 적용받으므로 고령 투자자로 인정받기 어려울 수 있다는 시각이다.

더 큰 난관도 있다. 2021년 3월말 이후 홍콩H지수 ELS 상품 판매 과정에 금소법 위반 여부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는 금소법 시행 직후 금융 당국이 금소법으로 새로 도입되거나 강화된 규제에 대해선 위반하더라도 조치하지 않겠다는 ‘비조치 의견서’를 발급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준으로 2021년 9월24일까지 6개월 동안 ‘계도 기간’을 부여했다.

그럼에도 금융권은 현재 최대 이슈로 불거진 홍콩H지수 ELS 상품과 관련해 은행권이 금소법상 절차를 형식적으로 준수했다는 점에서 불완전판매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 소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가입 당시 상품에 대한 설명은 물론, 가입 서류에 투자자의 서명과 녹취 의무도 이행했다는 이유에서다. 일부에서는 홍콩H지수 ELS 판매 과정에서 판매원칙 위반이 확인될 경우 ‘위법계약 해지권’이 적극 활용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위법계약 해지가 받아들여지면, 추가 손실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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