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가 파오차이?…설 곳 잃은 韓표기법 ‘신치’
  • 정윤경 기자 (jungiza@sisajournal.com)
  • 승인 2024.01.2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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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신치’ 명시한지 3년 지났는데…식당은 ‘파오차이’ 여전
서울시 ‘신치’ 스티커 보급하겠다지만 현장은 ‘싸늘’
명동역 부근 음식점 메뉴판에 김치가 중국식 야채절임인 ‘파오차이(泡菜)’로 표기돼 있는 모습 ⓒ시사저널 정윤경
명동역 부근 음식점 메뉴판에 김치가 중국식 야채절임인 ‘파오차이(泡菜)’로 표기돼 있는 모습 ⓒ시사저널 정윤경

한국 전통음식을 매개로 한 중국의 노골적인 역사 왜곡이 이어지는 가운데 외국인이 많이 찾는 명동이나 인사동에서 여전히 김치를 ‘파오차이(泡菜·중국식 야채절임)’로 표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정부가 김치의 중국어 표기를 ‘신치(辛奇)’라고 명시했지만, 현장에서는 실효성에 의문을 표하며 시큰둥한 반응이다.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정책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명동 식당 20곳 중 17곳 ‘신치’ 아닌 ‘파오차이’ 기재

22일 오전 11시께 명동역 8번 출구 부근. 음식점 골목은 점심시간을 맞아 직장인과 관광객으로 붐볐다. 여행 캐리어를 끈 ‘유커(遊客·중국 단체 관광객)’도 상당수 보였다.

명동 일대에서 김치 관련 메뉴를 판매하는 업소 20여 곳을 살펴본 결과 17곳이 김치찌개·김치전·낙지김치죽·김치우동·김치계란말이 등 메뉴를 ‘파오차이’로 기재하고 있었다. 단 3곳만 김치를 ‘신치’로 표기했다.

분식집을 운영하는 김아무개(35)씨는 “번역기를 사용해서 김치를 파오차이로 표기했다”며 “자세한 건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구글 번역기에 김치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파오차이로 나온다. 국내 기업인 네이버의 파파고 번역기를 사용해야 신치로 번역된다. 지난해 9월 서울시가 구글 코리아에 김치의 중국어 번역 결과가 ‘파오차이’로 노출되지 않도록 정정을 요청했지만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파오차이가 아닌 신치로 메뉴판을 구성했다는 고아무개(47)씨는 중국인 관광객으로부터 항의성 의견을 듣기도 했다. 고씨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외국어를 전공한 지인으로부터 검수를 받아 일본어, 중국어 메뉴판을 만들었다”면서 “중국인 가이드 등이 신치라고 적힌 메뉴판을 보더니 ‘파오차이’로 바꾸라며 사진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전했다.

구글 번역기에 김치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중국식 야채절임인 ‘파오차이(泡菜)’가 나온다. ⓒ구글 캡쳐
구글 번역기에 김치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중국식 야채절임인 ‘파오차이(泡菜)’가 나온다. ⓒ구글 번역기 캡쳐

서울시 ‘신치’ 스티커 보급했지만…현장에선 ‘갸우뚱’

서울시는 지난해 9월부터 외국어 표기 오류를 바로잡는 시민 점검단 활동을 지원하고, 신치라고 적힌 스티커를 배부해 메뉴판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왔다. 그런데 이날 만난 상인들은 시의 정책을 제대로 모르고 있거나 인지하더라도 실효성에 의문을 품었다.

고깃집을 운영하는 강아무개(46)씨는 시의 정책에 “처음 들어봤다. 기사에서 파오차이가 잘못된 표기라고 얼핏 본 것 같다”고 했다. 강씨는 “지금처럼 스티커를 붙이는 방법이라면 미관상으로 보기 좋지 않을 것”이라면서 “업장마다 글씨 크기나 폰트 등이 다른데 어떻게 하나로 통일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이어 메뉴판을 교체할 의향에 대해서는 “속지와 겉표지를 전부 바꾸려면 130만원 정도 든다는 견적을 받았다”며 “업주 입장에서는 부담”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와 관련 서울시 관계자는 “올바른 외국어 표기를 홍보하기 위해 명동 식당 180여 곳 중 30곳에 신치라고 적힌 스티커를 크기별로 배부했다”면서도 “두어 번에 걸쳐 사후 점검을 했지만 업장에 스티커 부착을 강요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외국어 표기가 잘못된 메뉴판을 교체한 업주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일부 보도에 대해서는 “시 차원에서 인센티브를 제공한 적은 없다”고 밝혔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중국어로 김치를 신치로 써야 한다는 홍보가 부족했다”면서 “자영업자들에게 일괄적으로 바꾸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지자체가 신치라고 적힌 다양한 글꼴을 온라인상에 무료로 배포해 (자영업자가) 프린트할 수 있게끔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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