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증여세 폭탄에 발목 잡힌 한국 기업들
  • 송응철 기자 (sec@sisajournal.com)
  • 승인 2024.02.06 07:30
  • 호수 1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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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세율에 가업 승계 포기하는 기업 잇달아 
한미약품·넥슨 등 상속 ‘후폭풍’…상속제 정상 납부해도 경영권 위협

우리 기업들에 상속세는 ‘공포’ 그 자체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높은 세율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상속세를 납부할 경우 경영권 승계는 고사하고 기업의 영속조차 장담할 수 없을 정도다. 실제로 많은 중소·중견기업이 상속세를 감당하지 못해 경영권을 매각하거나 사업을 정리하는 수순을 밟았다.

서울 중구 남산공원에서 바라본 종로 지역의 대기업 빌딩 숲 ⓒ시사저널 최준필
서울 중구 남산공원에서 바라본 종로 지역의 대기업 빌딩 숲 ⓒ시사저널 최준필

상속세 위기감, 대기업까지 확산

상속세로 인한 위기감은 중소·중견기업을 넘어 대기업까지 확산하고 있다. 최근 한미약품그룹에서 벌어진 경영권 분쟁이 그 촉매가 됐다. 한미약품가(家)는 OCI그룹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고(故)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의 부인 송영숙 한미약품 회장, 장녀 임주현 한미약품 사장 모녀와 이에 반대하는 장남 임종윤 한미약품 사장, 차남 임종훈 한미약품 사장 형제간 골육상쟁(骨肉相爭)이 벌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상속세가 있다. 재계에서는 송 회장이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OCI그룹과의 통합 결정을 내렸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송 회장과 임종윤·임주현·임종훈 삼남매는 2020년 임 회장 작고 이후 고인의 한미사이언스 지분 34.29%를 상속받았다. 이 과정에서 송 회장 일가에 부과된 상속세는 약 5400억원에 달했다.

송 회장은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지난해 사모펀드 운용사 라데팡스파트너스와 한미사이언스 지분 11.8%를 약 3200억원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한 배경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계약은 불발에 그쳤다. 거래에 참여할 예정이던 새마을금고가 부실 논란으로 뱅크런을 겪으며 투자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이후 OCI그룹과의 통합이 추진됐다. 경영권 유지와 상속세 재원 마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복안이었지만, 결국 가족 간 불화의 씨앗이 됐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본(55%)에 이은 2위다. 하지만 일정 규모 이상 기업에 적용되는 최대주주 할증(10%)까지 더해지면 60%로 사실상 1위다. 상속세 때문에 경영권 승계는 물론 기업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재계의 주장을 마냥 엄살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때문에 기업들은 그동안 상속세 납부를 위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러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의 유족들은 12조원에 달하는 상속세 납부를 위해 미술품 대납과 주식담보대출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상속세 재원 마련이 여의치 않자 최근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세 모녀는 지배력 약화 리스크에도 삼성전자 지분 약 0.5%를 매각해 2조8000억원을 조달했다.

고(故) 김정주 넥슨 창업주의 유족들은 약 6조원의 상속세를 넥슨 지주사인 NXC 지분 29.3%로 물납했다. 이로써 정부가 NXC 2대 주주에 등극하게 됐다. 삼성과 넥슨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사실상 승계를 포기한 상황이다. 최대 7조원의 상속세가 예상돼 사실상 기업을 승계할 방법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향후 셀트리온은 국영기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서 회장의 설명이다.

중견기업으로 눈을 돌려보면 상속세를 감당하지 못해 경영권을 포기한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의료용 장갑과 콘돔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인정받은 유니더스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창업주인 고(故) 김덕성 유니더스 회장이 2015년 별세하면서 불거졌다. 김 회장으로부터 지분을 상속받은 김성훈 유니더스 대표는 상속세 50억원을 10년에 걸쳐 납부하기로 국세청과 협의했다. 그러나 중국발 사드(THAAD) 여파로 유니더스가 경영난에 직면하면서 계획은 틀어졌다. 결국 김 대표는 유니더스를 사모펀드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세계 손톱깎이 점유율 1위 기업인 쓰리쎄븐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2008년 고(故) 김형규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유족들에게는 150억원의 상속세가 부과됐다. 상속세 마련을 위해 가업승계특례제도를 고려했지만 수많은 제약에 가로막혀 결국 경영권 매각을 추진했다. 이 밖에 국내 가구 업계 1위 한샘과 밀폐용기 1위 락앤락 등도 상속·증여세 압박에 기업 매각을 선택한 사례로 지목된다.

이 중에서도 주목되는 기업이 있다. 경영권 매각 이후 락앤락의 실적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22년에는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3분의 1 토막 났고, 당기순이익은 적자로 전환됐다. 2023년에는 영업이익 역시 206억원의 적자(3분기 기준)로 돌아섰다. 당장 주가가 요동쳤다. 경영권 교체 당시인 2017년 3만원을 오르내리던 주가는 현재 5000원대까지 추락한 상태다. 락앤락은 사업장 및 인력 구조조정을 예고했다. 이 과정에서 노조와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

일본·독일·프랑스·미국·영국 실부담률은 한국보다 낮아

재계에서는 알짜 회사인 락앤락의 실적 악화가 2017년 대주주 교체 후 진행된 점에 주목한다. 경영권을 인수한 홍콩 사모펀드(PEF) 운영사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는 그동안 경영보다 배당과 자산 매각에 집중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2022년에는 거액의 당기순손실에도 830억원의 배당금을 주주에게 지급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락앤락 노조 역시 회사의 위기가 경영진의 경영 실패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막대한 상속세와 이후 벌어지는 경영권 매각이 기업뿐 아니라 국가 경쟁력 악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기업들은 높은 상속세 부담 속에서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해 다양한 편법을 동원해 왔다. 후계자의 개인회사에 일감을 몰아줘 매출을 올리게 한 후 이를 승계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런 방식은 다른 기업들의 사업 참여 기회를 박탈해 공정거래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또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영업이익을 초과하는 배당금을 지급하는 일도 빈번했다. 기업 경쟁력 강화에 투입해야 할 자금이 ‘세금용’으로 사용된 셈이다.

그렇다면 다른 국가들의 상황은 어떨까. OECD 회원국 중 일본(55%)과 독일(50%), 프랑스(45%), 미국·영국(40%) 등도 상속세율이 높은 편이다. 그러나 공제 혜택으로 실제 부담하는 상속세는 한국보다 낮다. 일본은 비상장기업의 경우 세액 80%의 납부를 유예했다가 5년 후 대표직 유지와 지분 보유 등의 요건을 충족하면 면제해줘 실효세율은 11% 정도다.

독일도 상속인이 배우자나 직계존속 또는 직계비속일 경우 최고세율이 30%로 낮아진다. 여기에 2016년부터는 상속재산 2600만 유로(360억원)까지 상속세를 면제하고 있으며, 2600만 유로 이상인 경우에도 단계적 감면율을 적용하고 있다. 미국은 직계존속이 2340만 달러(약 306억원)까지 세금 없이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

OECD 회원국 중 호주와 캐나다 등 15개국에는 상속세가 아예 없다. 특히 포르투갈·슬로바키아(2004년)와 스웨덴(2005년), 체코(2014년) 등은 2000년대 이후 상속세를 폐지했다. 상속세로 세수를 충당하는 것보다 가업을 이어받아 더 많은 법인세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편이 사회에 이익이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결과로 해석된다. 조웅규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는 “가업 상속의 경우 상속세를 줄여주거나, 아예 면제하는 해외 선진국들과 달리 한국은 상속세율뿐 아니라 상속세 부과 방식도 OECD 국가 중 최고다”면서 “이대로 방치하면 젊은 자산가의 해외 이탈을 가속화하는 ‘코리아 택스 에미그레이션(Korea Tax Emigration)’이 나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재계에서도 유독 높은 한국의 상속세율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재계의 권익을 대변하는 경제단체들은 그동안 정부에 상속세 완화와 관련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계속 요구해 왔다. 한국경제인협회 등 경제5단체는 지난해 말 세계 각국 대비 과중한 국내의 상속세가 기업 투자와 개인 소비를 위축시켜 경제성장을 제약한다는 취지의 ‘글로벌 스탠더드 규제개선 공동 건의집’을 발간했다.

같은 해 대한상공회의소는 국내 상속세 체계가 다른 OECD 회원국에 비해 과중하다는 주장이 담긴 ‘2023년 조세제도 개선 과제 건의서’를,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현행 상속세 최고세율을 60%에서 OECD 평균인 25%로 줄여야 한다는 내용의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한 세제개선 건의서’를 각각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물론 정부도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다. 재계의 의견을 수용해 2008년 기업 승계 장려를 위한 가업상속공제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제도의 수혜를 보는 경우는 한정적이었다. 매출 5000억원 이하 기업만 공제를 적용받을 수 있고, 피상속인도 10년 이상 기업을 경영해야 하는 등 요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016년부터 2021년까지 6년 동안 연평균 가업상속공제 이용 건수는 95.7건, 총 공제금액은 2967억원에 불과했다.

2022년 말에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도 했다. 가업상속공제 적용 대상을 기존 매출액 4000억원 미만 중소·중견기업에서 5000억원 미만으로 확대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공제 한도도 최대 500억원에서 600억원으로 늘렸고, 상속세나 증여세 납부유예 제도도 신설됐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일부 중견기업은 어느 정도 혜택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기업들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윤 대통령 상속세 완화 시사 발언 주목

재계는 현재 윤석열 정부를 기대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상속세 개편을 내세운 바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윤 대통령이 1월17일 한국거래소에서 주재한 ‘상생의 금융, 기회의 사다리 확대’ 민생토론회에서 상속세 완화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면서 재계의 기대감은 한층 높아지고 있다. 이날 윤 대통령은 한국의 높은 상속세율을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하면서 “소액주주는 주가가 올라야 이득을 보지만 대주주는 주가가 너무 올라가면 상속세를 어마어마하게 물게 된다. 거기에다 할증세까지 있다”며 “재벌이나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상장사들은 주가가 올라가면 가업 승계가 불가능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가업 승계가 불가능해지면 기업을 팔아야 하고 근무자의 고용 상황도 불안해진다. 기업의 기술도 제대로 승계되고 발전되기 어려워진다”며 “그래서 우리나라에 독일과 같은 강소기업이 별로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상속세가 과도한 할증 과세라고 하는 데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이런 발언 이후 부자 감세 논란과 세수 감소 우려가 함께 제기되자 대통령실은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1월18일 브리핑에서 “상속세를 지금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며 “상속세는 국민이 합의해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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