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절집에 매화 향기 가득…‘매화 1번지’ 전남 순천
  • 정성환 호남본부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24.02.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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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오나 싶었는데” 남도에 내려앉은 봄…금둔사 ‘납월매’·선암사 ‘선암매’
상춘객 유혹하는 산사에 그윽한 매향…각양각색의 매력, 아름답기는 梅한가지
2022년 3월 순천 선암사 무우전 담벼락에 활짝 핀 선암매 홍매화 풍경  ⓒ시사저널 정성환
2022년 3월, 순천 선암사 무우전 담벼락에 활짝 핀 '선암매' 홍매화 풍경 ⓒ시사저널 

새해의 첫 절기인 입춘(立春)도 지났다. 언제 봄이 오나 싶었는데, 어느덧 남도에 봄이 내려앉았다. 산사의 은은한 매화향 끝에서 봄은 이미 시작됐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 도도하고 단아한 자태를 드러낸 매화 향기가 산사를 휘감으며 봄을 재촉한다. 매화는 매서운 추위를 뚫고 피어 강인함과 지조를 상징하기도 하고, 기품 있는 자태로 고고함을 대표하기도 한다. ‘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는 신흠(申欽)의 칭송이 아깝지 않다. 퇴계 이황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두 72제 107수의 매화 시를 쓸 정도로 매화를 아꼈다. 퇴계의 마지막 유언은 ‘저 매화나무에 물 줘라’였다. 

옛 선비들이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은은히 풍기던 매향을 좇아 탐매(探梅)하던 토종 매화는 대개 산속 절집 외딴 곳에 숨어 있다. 순천 낙안 금둔사 납월매는 남도의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전령이다. 또 다른 절집 선암사 ‘선암매’가 바통을 이어 받는다. 자연의 순리일까. 꽃샘추위의 시샘에 따른 ‘계절 지체’로 예년보다 늦었지만 봄의 상징과도 같은 매화가 전남 순천의 산사에 수줍게 피었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인 12일 ‘탐매(探梅)’를 위해 순천 산사와 마을을 찾았다. 

순천 금둔사 요사체 뒤편에 핀 '납월매' ⓒ시사저널 정성환
순천 금둔사 요사체 뒤편에 핀 '납월매' ⓒ시사저널 정성환
금둔사 납월홍매 ⓒ시사저널
금둔사 납월홍매 ⓒ시사저널

남도의 첫봄을 알린다…금둔사 ‘납월매’

순천 매화 여행의 시작지는 금전산(金錢山) 금둔사(金芚寺)다. 금둔사는 해마다 먼저 꽃소식을 전해주는 절집이다. 낙안면에 있는 금둔사는 순천의 대표적 사찰인 선암사나 송광사에 가려진 한적한 사찰이다. 하지만 ‘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금둔사는 크지 않은 절이라 돌아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지만 그 깊고 그윽한 매화향 때문에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산사 곳곳에 소담한 매화가 피기 때문이다. 

이 작은 사찰 경내에는 홍매화와 청매화 여섯 그루가 있다. 피는 순서에 따라 1번부터 6번까지 일련번호를 달고 있다. 금둔사의 매화는 ‘납월매’라고 불린다. ‘납월’은 음력 섣달(12월)을 뜻하는 말로, 그만큼 일찍부터 꽃망울을 틔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남도에서도 가장 일찍 피어나는 매화나무 중 하나다. 대부분의 매화들이 빨라야 양력 2월 하순부터 늦으면 3월 중순이 지나야 비로소 꽃을 피워내는 반면 ‘납월홍매’라고 불리는 이곳 분홍빛 홍매화들은 그보다 한두달 빠른 음력 섣달부터 꽃망울을 터뜨린다. 홍매화가 지기 시작하면서 하얀 팝콘 같은 청매화들이 톡톡 올라온다. 납월홍매는, 그러니까 봄이 왔나 안 왔나를 살피러 나온 ‘관측병’인 셈이다. 그런데 올해는 변고가 생겼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금둔사 대웅전 왼쪽 편에 자리 잡은 납월홍매(첫번째 매화나무)가 올해는 때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꽃봉오리를 열 기미를 안 보여 설왕설래다. 호사가들은 “금둔사 제2의 창건을 이끌었던 지허 스님이 지난해 10월 입적했는데 그 뒤 어찌된 영문인지 납월매가 필 때를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통 소식이 없다”고 말한다. ‘선농일치(禪農一致)’라는 말을 자주 하며 ‘농사짓는 게 곧 참선이다’이라고 했던 지허 스님이 홀연히 떠난 것을 매화도 아는 건가 싶더라는 얘기다. ⓒ시사저널 정성환​
​금둔사 대웅전 왼쪽 편에 자리 잡은 납월홍매(첫번째 매화나무)가 올해는 때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꽃봉오리를 열 기미를 안 보여 설왕설래다. 호사가들은 “금둔사 제2의 창건을 이끌었던 지허 스님이 지난해 10월 입적했는데 그 뒤 어찌된 영문인지 납월매가 필 때를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통 소식이 없다”고 말한다. ‘선농일치(禪農一致)’라는 말을 자주 하며 ‘농사짓는 게 곧 참선이다’이라고 했던 지허 스님이 홀연히 떠난 것을 매화도 아는 건가 싶더라는 얘기다. ⓒ시사저널 정성환​

설중에 홍매화 피던 금둔사에 무슨 일이…

마침 찾아간 날은 아쉽게도 만개한 납월홍매를 만끽하지는 못했다. 대웅전 왼쪽 편에 자리 잡은 납월홍매(첫번째 매화나무)가 올해는 때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영 꽃봉오리를 열 기미가 안 보여서다. 호사가들은 “금둔사 제2의 창건을 이끌었던 지허 스님이 지난해 10월 입적했는데 그 뒤 어찌된 영문인지 납월매가 필 때를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통 소식이 없다”고 전한다. ‘선농일치(禪農一致)’라는 말을 자주 하며 ‘농사짓는 게 곧 참선이다’이라고 했던 지허 스님이 홀연히 떠난 것을 매화도 아는 건가 싶더라는 얘기다.  

사찰 측도 죄라도 지은 양 어쩔 줄 몰라 하는 분위기다. 새 주지로 온 승국 스님은 “(그런 얘기를)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며 “다만, 사람들이 허전한 마음을 다 가지고 있으니 그런 것이 밑바탕에서 깔려 나온 애기 같다”고 말했다. 이어 “작년 11월에 예년과 달리 많은 눈이 쌓여 기후변화에 민감한 납월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며 “또 축대공사를 하면서 대웅전 옆으로 차량들이 빈번하게 지나다니는 등 주변 환경 변화도 ‘개화 지체’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고 부연했다.     

금둔사에 매화나무를 식재한 주인공은 태고종 종정을 지낸 지허다. 금전산 아래 낙안읍성에서 600년 묵은 노거수의 씨앗 한 움큼을 받아와 금둔사 곳곳에 뿌린 건 1985년의 일이다. 그 씨앗 중에서 6개가 살아남아 추위 매운 계절에 꽃을 피운다. 생전의 스님은 “매화가 부처”라고 말했었다.

올해는 개화가 많이 늦었다. 그래도 요사채 쪽으로 올라가니 산신각 옆 세번째 홍매화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렸다. 누군가 꼭꼭 숨겨놓은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해마다 요사채 뒤 두 번째 나무가 제일 먼저 피웠는데 올해는 개화가 늦고, 대신 산신각 쪽 세째 나무가 일찍 폈다.

반전이랄까. 납월홍매의 개화 지체가 뜻밖의 소득을 가져올 전망이다. 승국 스님은 “예년에는 납월매가 월등히 빨리 펴 함께 어우러질 기회가 없었으나 올해는 납월매가 개화 속도를 늦추는 바람에 2월 말에서 3월 초 쯤 청매화, 백매화와 함께 다 같이 어우러지는 대이변을 연출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선암사 경내 원통전~각황전 담길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길에, 주로 종정원(宗正院) 돌담길에 있는 이들 매화나무를 가리켜 ‘선암매’라고 한다. 홍매인 선암매는 거구에 기품까지 갖춰 으뜸으로 친다. 아직 만개한 꽃을 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산사 매화는 개량종보다 보름 정도 늦게 핀다. 선암사 종무소 측은 꽃샘추위와 씨름 끝에 매화가 3월 중순쯤 움을 트고 만개할 것으로 전망했다. ⓒ시사저널 정성환
선암사 경내 원통전~각황전 담길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길에, 주로 종정원(宗正院) 돌담길에 있는 이들 매화나무를 가리켜 ‘선암매’라고 한다. 홍매인 선암매는 거구에 기품까지 갖춰 으뜸으로 친다. 아직 만개한 꽃을 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산사 매화는 개량종보다 보름 정도 늦게 핀다. 선암사 종무소 측은 꽃샘추위와 씨름 끝에 매화가 3월 중순쯤 움을 트고 만개할 것으로 전망했다. ⓒ시사저널 정성환

‘향긋한 절집’ 선암사…“선암매에 흠뻑 취할라”

순천의 또 다른 산사에서도 매화는 핀다. 봄날, 최고의 향긋한 절집은 선암사다. 사찰 경내에는 수령이 350~650년에 이르는 토종 매화나무 50여 그루가 곳곳에 흩어져 서식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는 수령 650년, 나무 높이 11m의 원통전 뒤 백매화이다. 원통전~각황전 담길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길에, 주로 종정원(宗正院) 돌담길에 있는 매화나무들을 ‘선암매’라고 특별히 부른다. 홍매화인 선암매는 거구에 기품까지 갖춰 으뜸으로 친다.

이날 정오쯤, 선암사를 찾았다. 선암사 구 매표소에서 계곡을 따라 절간에 이르는 흙길은 좌우로 참나무와 야생차나무가 빽빽한 숲길이다. 완만하게 휘어진 모양이 운치 있어 ‘가다가 돌아봐도 예쁜 길’이다. 선암사는 다른 사찰에 비해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설 연휴를 맞아 많은 상춘객들이 산책로를 따라 올라갔다. 한참 가다보면 많이 봐왔던 승선교(보물 제400호)도 볼 수 있다. 흐르는 물은 어찌 그리 맑은 지 한 모금 먹어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다.

마침내 절집에 도착했다. 매서운 겨울 추위를 견디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나무들이 종정원 담장을 따라 고운 꽃그늘을 드리우길 바랐지만 매화의 절반은 움이 텄고, 또 절반은 움 속에 숨어 만개할 채비를 하고 있다. 겨울이 길긴 길다. 좀처럼 추위가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직 만개한 꽃을 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그래도 새봄의 기운을 먼저 느끼려는 가족과 연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연일 영상 15도를 웃도는 날씨 덕분에 만개할 날이 멀지 않았다. 산사 매화는 개량종보다 보름 정도 늦게 핀다. 선암사 종무소 측은 꽃샘추위와 씨름 끝에 매화가 3월 중순쯤 움을 트고 만개할 것으로 내다봤다.

2월 12일 오후, 순천 선암사를 찾은 상춘객들이 선암매 돌담길을 거닐며 차분하게 한껏 차오를 매화 기품을 즐겼다. ⓒ시사저널 정성환
2월 12일 오후, 순천 선암사를 찾은 상춘객들이 차분하게 선암매 돌담길을 걸으며 한껏 차오를 매화 기품을 음미했다. ⓒ시사저널 정성환

조계산(887.2m) 동쪽 자락에 자리한 선암사는 1500년 역사의 고찰이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국내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선암사를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3월이면 사찰을 묵묵히 지키는 수령 600년 된 매화나무의 향이 그윽하다. 염불과 목탁 소리 흐르는 마당만 거닐어도 마음은 향기로워진다. 경관적 가치에서 선암매를 앞설 나무는 아직 없다. 문화재청에서 꼽은 우리나라 4대 매화 가운데에 첫손에 꼽는 나무는 2007년 11월에 천연기념물(제488호)로 지정한 ‘선암사 선암매’다.

그해 가을에 4대 매화를 일제히 지정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크며, 여전히 가장 싱그러운 자태를 유지하는 나무는 단연 선암매다. 빛깔이 아름다워 매화 중에서도 ‘명품’에 속한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선암사 경내는 매서운 겨울 추위를 견디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나무들이 종정원 담장을 따라 고운 꽃그늘을 드리운다.

뒤쪽 승방 앞에 있는 작은 연못은 하얀 매화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며 낙화는 또 다른 꽃으로 탄생한다. 이곳 해설사는 “선암매를 보면 그 해 봄을 다 본 것이고 우리나라 매화를 다 본 것”이라고도 했다. 매화 가운데 으뜸이라는 것이다. 선암매의 향기는 남달리 강하여 사찰 경내를 가득 채우고 산모퉁이 바깥까지 퍼지고도 남는다.

선암사 방장 지암 스님 ⓒ시사저널
선암사 방장 지암 스님 ⓒ시사저널

경내에 들어서자 백매와 홍매가 조화롭게 서 있고 사찰 지붕이 온통 매화나무 가지로 덮였다. 절의 창건 당시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홍매화 한 그루가 쇠잔해진 몸뚱아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무우전(無憂殿) 돌담 가에 수줍게 드리웠다. 이 담장을 따라서 피어난 20여 그루 매화나무는 매년 3월이면 장관을 이룬다. 매화 밑동에는 이끼가 붙어 있고, 일부 나무껍질이 일어서서 한눈에도 나무가 견뎌 온 오랜 세월을 짐작할 수 있다. 원통전 담장 뒤편에 백매화 가지는 무채색 지붕과 맞물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이날 취재진과 경내에서 우연히 조우한 선암사 방장 지암 스님은 “매화는 추운 겨울을 버텨나기 때문에 꽃을 멋지게 피우고,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며 “그만큼 견디고 고통을 겪으며 정진해야만 매화처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선암사를 찾은 상춘객들은 다들 차분하게 선암매 돌담길을 걸으며 한껏 차오를 매화 기품을 음미했다. 전북 전주에서 왔다는 이상철(59)씨는 “매년 사찰에서 우아함을 더해 매력적인 향기를 품은 매화를 보면서 봄나들이도 즐기고, 힐링의 시간을 갖기 위해 산사를 찾는다”고 말했다. 울산에서 남편과 함께 온 김숙희(63)씨는 “금둔사 홍매화는 설중매로 불리 정도로 워낙 유명해서 혹시나 피었을까 해 둘러봤는데 아직 덜 핀 나무들이 많아서 조금은 아쉽지만 선뜻 찾아온 남도의 봄기운을 만끽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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