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요부 ‘살로메’를 남성 창극으로 만나다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2.18 14:00
  • 호수 1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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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에서 시작…창극 버전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남성 창극 살로메》 주목

아일랜드 출신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의 주인공 살로메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공주다. 마태복음(14장 3~12절)과 마르코복음(6장 17~29절)에 따르면, 예수가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구세주를 예고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하며 그 대가로 의붓아버지 헤로데 왕 앞에서 선정적인 ‘일곱 베일의 춤’을 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복음서 내용을 살펴보면, 세례자 요한의 목숨을 원한 것이 살로메가 아니라 어머니 헤로디아 왕비였다. 그녀가 세례자 요한을 원수로 여긴 이유는 헤로디아는 원래 헤로데 왕의 제수였지만 나중에 그와 재혼했는데, 요한이 이를 비도덕적이라고 공개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었고, 결국 살로메를 통해 현재 남편 헤로데 왕에게 요한의 참수를 청한 것이다.

전통예술 남성창극 살로메 공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하지영
전통예술 남성창극 살로메 공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하지영
전통예술 남성창극 살로메 공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하지영
전통예술 남성창극 살로메 공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하지영

신약성경 바탕의 희곡 《살로메》

이 내용이 언급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마침 헤로데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로데를 기쁘게 하니 헤로데가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로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마태복음 14장)

헤로데 왕은 동생 빌립의 부인을 얻고도 그 딸 살로메의 춤에 반해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그것은 살로메가 스스로 매력적인 존재로서 남들 앞에서 춤을 추었을 뿐, 정작 그녀의 의도와 행동은 어머니에 가려진 소극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남자에게 도전을 감행했던 모든 여성의 사연을 샅샅이 뒤져 반사회적·반인륜적 악녀 캐릭터로 왜곡하는 일이 흔했던 19세기에 살로메는 매혹적인 춤을 앞세운 관능성과 무고한 세례자 남성을 죽음으로 이끄는 잔혹함이 결합된 악녀의 대표 캐릭터가 돼 미술, 문학, 오페라 등 각종 예술작품에 등장한다.

그 출발점으로 꼽히는 작품이 바로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희곡 《살로메》(1893)다. 이 작품에서 살로메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욕정을 품었지만 거절당해 그 복수로 그의 목숨을 요구하는데, 이는 원전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오스카 와일드는 왜 이런 왜곡에 가까운 각색을 시도했을까. 당시 동성애가 금기시된 시대에 그가 ‘동성애자 셀럽’으로서 유미주의의 선구적 업적을 이뤘지만, 게이문학에서 흔히 드러나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의도적 폄하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살로메가 과거에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캐릭터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이를 다룬 작품들은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큰 성과를 남겼다. 오스카 와일드가 덧칠한 욕망, 광기, 집착, 살인이라는 매력적인 재료들은 한 세기가 지나고 원하는 것을 욕망할 줄 아는 현대의 여성 캐릭터로 재해석되면서 대중의 사랑과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오스카 와일드로부터 파생된 많은 각색본에 새겨진 이러한 팜므파탈 여인의 전형인 살로메는 오늘날 동시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을 통해 대중적인 재미와 관심을 끄는 콘텐츠로도 꾸준히 재해석되고 있다.

올해 한국에서 《살로메》가 창극 버전으로 새롭게 만들어졌다. 신작 《남성 창극 살로메》가 2023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프로그램에서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돼 2월2~4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서 초연을 가진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서 동명의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가 공연된 적은 있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연희 장르인 창극으로 만들어진 것은 최초다.

특히 ‘남성 창극’을 표방하며 모든 배역을 남자배우들이 맡은 점이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전원 여성 국악인이 출연해 남장(男裝)을 하고 창을 공연했던 《여성국극(女性國劇)》이 1950년대에 반짝 흥행했던 역사가 있지만 그 반대인 남성 창극은 유례가 없다. 이번에 이러한 ‘크로스젠더(cross-gender)’를 시도한 예술가들은 그동안 전통과 현대를 잇는 많은 작품을 해온 베테랑들로, 작가 고선웅과 연출 김시화, 작창 정은혜, 작곡 김현섭, 안무 신선호, 의상 이상봉, 음악감독 이아람 등 화려한 라인업이다.

특히 연극, 뮤지컬, 창극을 넘나드는 전천후 장르 탐험가이자 국립창극단의 화제작 《변강쇠 점찍고 옹녀》 《귀토- 토끼의 팔란》 등에서 작가와 연출가로 활약한 고선웅 작가가 재해석하고 빚어낸 이번 작품은 색다르면서도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핵심적인 여성 배역인 살로메와 헤로디아 모녀를 남자배우가 맡게 되면서 그동안 여자배우가 맡아온 《살로메》의 퇴폐성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차별성이 드러난다.

전통예술 남성창극 살로메 공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하지영
전통예술 남성창극 살로메 공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하지영

2023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

남성 판소리가 주는 강인함을 드러내면서도 요염함 또한 감추지 않는 ‘남성 살로메’의 기운은 다른 여성 버전에 비해 상대역인 요한을 압도한다. 또한 살로메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무모하게 빠져든 근위대장 나라보스가 시종 메나드와 펼치는 한 방향의 삼각관계, 헤로디아 왕비가 메나드, 헤로데와의 관계를 펼치는 권력과 사랑의 관계성도 창 공연과 연극, 무용이 시시각각 교차하는 긴장감 강한 에너지로 치환된다.

오스카 와일드가 희곡에서 묘사한 달빛의 아름다움 너머의 불길한 징조와 죽음을 극대화한 무대 연출도 돋보였다. 달빛 아래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절망적인 상황을 맞닥뜨리며 죽음을 맞게 된다. 특히 주인공 살로메를 맡은 배우들의 열연이 작품의 핵심이기도 하다. 국악계 아이돌로 불리며 전작에서도 여러 차례 여성 배역을 맡았던 소리꾼 김준수와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순신》에서 무인 역을 맡았던 윤제원이 살로메를 나눠 맡았다. 헤로데 왕 역의 유태평양의 존재감도 상당하다. 이 작품은 서울 초연 공연기간은 짧았지만 공연계의 화제작으로 떠올라 오는 4월 서울 강동아트센터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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