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광그룹 2인자의 갑작스러운 해임 미스터리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4.02.25 08:00
  • 호수 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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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이호진 전 회장과 고위 관계자 카톡 대화창 분석해 보니…
경영 공백기에도 막후에서 광범위하게 경영 관여했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은 2011년 400억원대 회삿돈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됐다. 이듬해 회장직에서도 물러나면서 1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경영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빈자리를 채운 가신 중 한 명이 김기유 전 티시스 사장 겸 그룹경영협의회 의장으로 평가된다. 그는 2014년 그룹 경영기획실장에 오르며 24개 계열사 업무를 총괄했다. 2022년부터는 그룹경영협의회 의장도 맡았다. 경영협의회는 그룹의 주요 경영 안건 등을 논의하는 경영협의기구다. 24개 계열사 대표와 임원 등이 협의회에 속해 있다. 김 전 사장을 두고 ‘그룹 실세’라거나 ‘2인자’였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 이유다.

지난해 8월15일 이 전 회장이 복권되면서 두 사람의 끈끈했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룹 안팎에서는 이 전 회장 복권 후 경영 복귀 수순을 당연하게 여겼다. 구체적인 시점이 언제냐가 관건이었다. 그런데 변수가 하나 생겼다. 그룹의 2인자이자, 이 전 회장의 복심인 김기유 당시 사장이 8월24일 전격 해임된 것이다. 언론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왔지만, 내부 감사를 통해 개인 비위가 드러났을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실제로 태광그룹은 8월29일 감사 범위를 티시스에서 계열사 전체로 확대했고, 11월초에는 감사 결과를 바탕으로 김 전 사장을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태광그룹 2인자였던 김기유 전 티시스 사장 겸 그룹경영협의회 의장이 해임된 지 반년여가 흘렀지만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사진은 태광그룹 본사가 위치한 서울 신문로 흥국생명빌딩 모습 ⓒ 연합뉴스
태광그룹 2인자였던 김기유 전 티시스 사장 겸 그룹경영협의회 의장이 해임된 지 반년여가 흘렀지만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사진은 태광그룹 본사가 위치한 서울 신문로 흥국생명빌딩 모습 ⓒ 연합뉴스

1·2인자 갈등, 롯데홈쇼핑 사옥 매입서 비롯

하지만 일련의 과정이 석연치는 않다. 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8월29일)되기 전에 이미 김 전 사장이 해임(8월24일)됐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10년 가까이 오너의 경영 공백을 충실하게 메워온 가신은 왜 갑자기 내쫓기듯 그룹을 나가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우선 든다.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해 보면,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롯데홈쇼핑(법인명 우리홈쇼핑)은 그동안 세 들어 살던 양평동 사옥을 2039억원에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사회 의결도 마쳤다. 태광그룹이 롯데홈쇼핑의 2대주주(지분 45%)였던 만큼, 이사회 멤버 9명 중 4명이 태광그룹 소속이었다. 뒤늦게 이사회 통과 사실을 전해 들은 이호진 전 회장은 격노했다. 진상조사와 함께 감사를 지시했다. 당시 이 전 회장과 그룹 고위 관계자 간에 나뒀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보자. 두 사람의 대화는 8월5일 오후 1시쯤 시작해 다음 날 오전 9시쯤까지 이어진다.

이 전 회장 : 이 건 사전에 아셨을 거잖아?
고위 관계자 : 제가 사전에 안건을 보고받지는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전 회장 : 감사해. 사과로 끝날 일 아니니까. 법률적 검토도 하고. 전원 퇴사. 사표들 받아.
고위 관계자 : 예 강력히 조치하겠습니다.
이 전 회장 : 2000억짜리 부동산을 매입하는 건인데 검토보고서나 보고도 없이 처리한다는 게 말이 돼? 해당 부동산 가격도 감정하세요.
고위 관계자 : 예 세밀히 조사하고 철저히 대처하겠습니다.
이 전 회장 : 부동산 매입을 무효화시킬 방법 검토했어요?
고위 관계자 : 법적 검토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이 전 회장 : 보고 필요 없어. 무효화시켜. 모든 노력 기울일 것!

이 전 회장은 롯데홈쇼핑의 사옥 매입 건이 이사회를 통과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럴 만도 했다. 롯데와 태광그룹은 2006년 우리홈쇼핑(현 롯데홈쇼핑) 인수를 위한 경쟁자였다. 치열한 법적 다툼도 벌였다. 최종적으로 롯데가 승리하면서 태광은 2대주주로 밀려났다. 이후 태광그룹은 롯데홈쇼핑의 중요한 경영 안건이 나올 때마다 발목을 잡았다. 2022년 롯데건설의 PF 부실을 롯데홈쇼핑이 지원하려 할 때도 태광 측은 반대했다. 결국 지원액이 50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낮아졌고, 지원 방식 역시 대여로 변경된 후에야 겨우 이사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롯데홈쇼핑 사옥 매입을 두고 이 전 회장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는 태광그룹이나 김기유 전 사장 측도 크게 이견이 없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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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임 사유 두고 김기유 전 사장-그룹 ‘핑퐁게임’

하지만 8월6일 이 전 회장 지시로 경영협의회 긴급 대책회의가 열린 때부터 양측의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첫 번째 경영협의회 회의가 있고 20일도 안 돼 김기유 전 사장을 포함한 티시스 등기이사 5명이 전격적으로 해임됐다. 하지만 이들이 해임을 통보받은 일자가 8월24일이고, 실제 감사 착수일은 8월29일이라는 점에서 ‘선(先) 해임, 후(後) 감사’라고 김 전 사장 측은 지적한다. 김 전 사장 측의 한 관계자는 “당시 김 사장이 그룹경영협의회 의장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장도 모르게 감사팀이 결성되고, 해임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면서 “이 전 회장의 경영 복귀를 위해 걸림돌이 되는 김 전 사장을 제거하기 위해 표적 감사를 한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태광그룹 측의 의견은 달랐다. 김 전 사장과 측근들이 모의해 감사를 거부했기 때문에 해임이 불가피했다고 해명했다. 그룹 관계자는 “김 전 사장은 첫 번째 경영협의회 회의 때부터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감사가 시작되자 티시스 직원을 통해 회사 내부 자료를 외부로 유출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그 근거로 회사 내부 자료를 파란 상자 7개에 실어 옮기는 동영상을 기자에게 제시했다. 물론 김 전 사장 측은 “그룹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맞서고 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향후 수사기관의 조사 결과에 따라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태광그룹은 지난해 11월초부터 세 차례에 걸쳐 김 전 사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서울서부지검 형사4부는 지난 1월 김 전 사장과 계열 저축은행 대표이사 등의 주거지와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이미 언론에 알려진 대로 김 전 사장은 친분이 있던 부동산 개발업자로부터 사채 변제를 위해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계열 저축은행 대표에게 지시해 150억원 상당의 부당대출을 실행하게 한 혐의였다.

검찰 고발 직전인 10월말에는 서울경찰청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가 이 전 회장 자택과 태광그룹 본사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이 전 회장이 복권한 지 70여 일 만이었다. 경찰은 이 전 회장이 수십억원대 불법 비자금을 조성하고, 계열사 공사비를 부당지원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검경 조사 결과가 나와 봐야 사건의 본질 역시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주목되는 사실은 태광그룹이 경찰 압수수색 바로 다음 날 입장문을 배포했다는 점이다. 혐의 주체는 이 전 회장이 아니라 공백 기간에 그룹 경영을 맡았던 전 경영진의 비위 행위였다는 게 요지였다. 하지만 시사저널 취재 과정에서 이 전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난 후에도 경영기획실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그룹 경영에 관여한 정황이 포착됐다. 시사저널이 단독 입수한 이 전 회장과 고위 임원의 카톡 대화 내용에 따르면, 이 전 회장은 막후에서 그룹의 주요 사안을 보고받았다. 이사회의 공장 증설 안건이나 투자비 의결 내용 등을 정기적으로 보고받는 것은 기본이다. 주요 안건이 있을 때마다 관련 대표나 임원을 불러 대면 보고를 받았다. 심지어 인사나 계열사 인력 구조조정, 춘천 휘슬링락CC나 태광CC 등 계열 골프장의 내장객 확보 방안 등까지 지시하고 보고받았다. 시민단체인 서민민생대책위원회가 2월20일 이 전 회장과 성회용 태광산업 대표이사를 경찰에 고발한 내용과 일정 부분 궤를 같이한다. 

지난해 초 불거진 흥국생명 배구단 감독 경질 논란 역시 이 전 회장이 막후에서 조정했기 때문이었다. 흥국생명은 지난해 1월2일 갑작스럽게 단장과 감독을 교체했다. 특히 권순찬 감독은 부임 8개월 만에, 그것도 시즌 중에 경질되면서 뒷말이 나왔다. 구단 측은 당시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맞지 않아 헤어지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팬들은 그룹 고위층의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일부 팬은 태광그룹 본사가 있는 서울 신문로 흥국생명 사옥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구단이 머리를 숙였다. 감독 경질 논란 8일 만인 1월10일 사과문을 발표했다. 재발 방지도 약속했다.

 

흥국생명 배구단 감독 경질 논란 때도 관여

롯데홈쇼핑 때와 마찬가지로 사건의 이면에는 이 전 회장의 입김이 있었다. 그는 2022년 11월 흥국생명의 경기를 보고 크게 화를 냈다. 선수 기용 문제를 제기하면서 새 감독 후보군을 추릴 것을 지시했다. 그는 “최강의 군단을 가지고도 이렇게 XX을 친다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면서 “빨리 새 감독 후보군을 추려라. 코치가 감독대행을 하는 것도 고려하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이 전 회장은 관련 인사들의 반성문 제출을 여러 차례 재촉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10월 단행된 경찰의 압수수색을 “(이 전 회장) 경영 공백기 때 발생한 전 경영진의 문제”로만 돌리는 태광그룹 측의 해명이 설득력 없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태광그룹 측은 “경찰 압수수색의 3가지 혐의가 모두 전직 경영진과 관련 있는 것으로 내부에서는 보고 있다”면서 “여러 가지 상황을 조합해볼 때 김 전 사장의 해임은 경영 복귀를 위한 오너의 가신 내치기가 아니라 경영 공백기를 틈탄 2인자의 호가호위가 맞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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