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시론] 그 많던 ‘친문’은 다 어디로 갔나?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kjm@jbnu.ac.kr)
  • 승인 2024.03.01 17:00
  • 호수 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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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을 보수진영에서 활동해 왔습니다…갑자기 나는 다른 보수주의자들과 다른 사람으로 분류되었고, 사회적 집단에서 멀어졌습니다. 나는 주말 내내 그저 침묵 속에서 울부짖었습니다.” 2019년 미국의 온건 보수파 인사이자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가 한 말이다.

도대체 무슨 죄를 졌길래 그렇게 모진 사회적 왕따를 당했던 걸까? 이유는 단 하나.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고 나선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한 죄였다. 이상한 일이다. 당시 트럼프에 대해선 보수 정치권에서도 ‘인간 말종’이라는 식의 비난이 난무하던 때가 아닌가. 공화당 정치인들이 트럼프를 향해 퍼부었던 비난 몇 개를 감상해 보자. “병적인 거짓말쟁이” “극단적으로 비도덕적인 인물”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수준의 나르시시스트” “먼지 하나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다”.

그러나 ‘트럼프 돌풍’을 막을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이 정치인들은 모두 이전의 말을 뒤엎고 트럼프에게 투표하라고 독려했다. 정치인은 그렇게 해도 양해가 되는 직업이다. 하지만 언론인은 다르다. 물론 언론인도 얼마든지 생각을 바꿀 수 있지만, 정치인처럼 그렇게 급변할 수는 없다. 그저 침묵 속에서 울부짖는 수밖에.

언론인 에즈라 클라인은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라는 책에서 50년 전이라면 공화당 엘리트들이 트럼프를 막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젠 왜 그게 불가능해졌단 말인가? 그는 당파성은 강해졌지만 정당은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답을 제시한다. ‘약한 정당과 강성 당원’으로 인해 선동가가 정치판을 장악하고 휘두를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강성 당원이 홍위병이 되어 정당을 지배할 수 있는 여지가 커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8일 서대문구 한 헬스장에서 직장인 정책간담회 전 런닝머신을 하고 있다. 러닝머신 화면에 같은 시간 국회 소통관에서 공천 관련 기자회견 중인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뉴스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8일 서대문구 한 헬스장에서 직장인 정책간담회 전 런닝머신을 하고 있다. 러닝머신 화면에 같은 시간 국회 소통관에서 공천 관련 기자회견 중인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뉴스가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이 아무리 친미 국가라곤 하지만, 어쩌자고 이런 것까지 미국 정치를 꼭 닮아가는지 모르겠다. ‘약한 정당과 강성 당원’ 현상은 한국에서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천 파동’은 정당이 약한 정도를 넘어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강력한 ‘정치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계파의 수장이 곧 정당이 돼버린 현실을 웅변해 주고 있다.

20년 전에 시민이 고객으로 대체되었다는 의미에서 ‘다운사이징 디마크러시’라는 말이 나왔지만, 이젠 시민은 물론 고객마저 ‘강성 당원’으로 쫄아든 ‘다운사이징’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때마침 나온 ‘“500명이면 결과 바꾼다”는 ARS, 팬덤 결집 친명에 유리’(중앙선데이 2월24일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거버넌스그룹 연구위원 박상훈이 지난해에 지적했듯이, “10만~20만 명 상당의 팬덤 당원만 있으면 당권은 물론 대선후보가 될 수 있게 됐”으니, 전국 차원에서건 지역 차원에서건 강성 팬덤 당원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고 할 수 있겠다.

브룩스가 느낀 ‘고립의 두려움’은 한국처럼 인구밀도가 촘촘하고 문화적 동질성이 강한 나라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그런데 주류 의견이라는 게 이렇다 할 튼튼한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강성 당원을 거느린 계파가 약한 정당을 장악한 후에 정당 내의 의견에 대한 강한 ‘처벌과 보상’을 통해 사실상 강요한 기회주의적 처세술의 결과라면 너무 허망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강성 팬덤의 수명이 짧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하긴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이라고 외친 그 많던 친문(親문재인)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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