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불거진 영풍그룹 파열음, 장씨-최씨 가문 75년 동거도 깨지나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4.03.12 07:30
  • 호수 1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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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고려아연 주총 앞두고 연일 장외 여론전
3세 경영 넘어가면서 불편한 ‘한 지붕 두 가족’ 체제 이어져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놓고 영풍그룹의 장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또다시 충돌했다.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까지 불사하겠다는 분위기다. 2월19일 고려아연 이사회를 통과한 안건에 대해 영풍 측이 반기를 든 게 발단이었다. 고려아연 이사회는 당시 2023년 결산 배당금을 1주당 5000원으로 확정했다. 중간배당액 1만원을 합하면 지난해 현금배당액은 1만5000원이 된다. 영풍 측은 이익잉여금이 7조3000억원으로 여력이 충분한데도 전년(2만원) 대비 배당액이 5000원 적다는 점을 지적하며 반대의사를 밝혔다. 물론 고려아연 측은 “1000억원의 자사주 소각을 포함할 경우 주주환원율이 76%로 전년(50.9%)에 비해 높아졌다고 맞서고 있다.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왼쪽)과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시사저널 사진 자료·뉴시스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왼쪽)과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시사저널 사진 자료·뉴시스

주총 표 대결 위해 우호 세력 모집 경쟁

양측은 신주인수권 등과 관련한 정관 변경 안건에 대해서도 부딪쳤다. 고려아연은 그동안 외국 합작법인에만 제3자 배정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주총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국내 법인에도 제3자 배정이 가능하도록 정관을 고칠 예정이다. 하지만 영풍은 “일방적인 정관 변경은 양사의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고 서로의 약속을 깨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3월말로 예정된 정기 주총에서 승부가 판가름날 것으로 예상된다.

두 가문의 지분율만 놓고 보면 장씨 가문이 유리하다. 장씨 가문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주)영풍과 오너 일가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31.02%에 이른다. 최씨 일가의 지분율(15.35%)보다 두 배 이상 높다. 하지만 고려아연이 2022년부터 확보한 우호 세력을 합할 경우 얘기가 달라진다. 고려아연은 그동안 자사주 교환 방식으로 현대차그룹과 한화, LG화학, 한국투자증권, 트라피규라 등을 재무적 투자자로 끌어들였다. 명분은 신사업을 위한 동맹 관계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2022년 회장에 취임한 후 신재생에너지와 이차전지 소재, 리사이클링을 새로운 먹거리로 정했다. 이후 자사주 교환 등의 방식으로 ‘지분 동맹’까지 맺었다. 이들 기업의 지분까지 포함할 경우 최씨 일가의 우호지분은 32.12%로 장씨 일가를 근소하게 앞서게 된다.

때문에 양측은 주총을 앞두고 우호지분을 끌어들이기 위해 첨예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공시와 언론 보도자료 등을 통해 반박에 반박을 거듭하고 있다. 소액주주 연대 플랫폼 액트는 고려아연 지지를 선언했다. 반대로 행동주의펀드 KCGI자산운용은 영풍에 찬성표를 던지고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재계 일각에서는 영풍과 고려아연의 이번 충돌을 ‘예견된 수순’이라고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영풍그룹의 모태는 1949년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공동으로 설립한 영풍기업사다. 두 집안은 지난 75년 동안 번갈아 그룹 회장을 맡으면서 잡음 없이 회사 성장을 이끌어왔다. 장씨 가문은 현재 (주)영풍과 전자 계열사인 영풍전자, 코리아써키트 등을 이끌고, 최씨 가문은 고려아연 중심의 비철금속 사업을 맡는 식이다. 지난해 5월 공정위가 발표한 영풍그룹의 자산은 16조8920억원, 계열사 수는 28개로 재계 순위는 28위다.

하지만 창업 1세대와 2세대를 거쳐 3세 체제에 접어들면서 두 그룹 간 파열 징후들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고려아연 이사회가 2022년 8월 한화그룹 미국 계열사인 한화H2에너지USA를 대상으로 제3자 유상증자를 결의한 게 대표적이다. 당시 한화H2에너지USA는 4717억5050만원을 투자해 고려아연 지분 5%를 취득했다. 최윤범 회장과 미국에서 동문수학했던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힘을 보탠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전 회장)은 이사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이 지배하는 코리아써키트와 테라닉스, 에이치씨 등 계열사를 동원해 고려아연 지분 0.58%를 매입했다. 고려아연에서 받은 거액의 배당금이 지분 매입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고려아연의 배당금 규모를 두고 벌이는 양측의 기싸움을 재계가 예사롭지 않게 바라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맞서 최 회장은 고려아연 자사주 6.02%를 활용해 우군을 늘려갔다. 고려아연 자사주 1.2%를 한화그룹 지주사인 한화 자사주 7.3%와 교환했고, LG화학에는 자사주 1.97%를 넘기고 이 회사 자사주 0.47%를 받았다. 또 글로벌 원자재 트레이딩 기업 트라피규라(1.5%)와 한국투자증권(0.8%), 모건스탠리(0.5%) 등 투자사에 자사주를 매각했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가 타사로 넘어가면 의결권이 다시 생긴다는 점을 이용해 여러 기업을 우군으로 확보한 셈이다. 지난해 9월에는 현대·기아차와 현대모비스가 공동 투자해 설립한 HMG글로벌이 유상증자 방식으로 고려아연 지분 5%를 확보했다.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에 위치한 영풍빌딩 전경 ⓒ시사저널 박정훈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에 위치한 영풍빌딩 전경 ⓒ시사저널 박정훈

“영풍-고려아연 분가는 예정된 수순”

두 집안의 경영권 분쟁은 3월 정기 주총을 기점으로 잠시 휴전에 들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최근 고려아연 경영권을 놓고 양측의 분쟁이 다시 재현됐다. 한동안 잠잠했던 장씨와 최씨 가문의 분가설 역시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재계에서는 두 차례의 경영권 분쟁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두 가문이 이참에 갈라설 수 있다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두 가문의 분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재계에서 회자돼 왔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그룹을 쪼갤지가 관건이었다”면서 “2019년 분가의 발목을 잡았던 7개의 순환출자 구조도 해소된 만큼 계열분리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다른 시각도 나온다. 영풍그룹 내부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고려아연은 현재 지주회사인 (주)영풍의 계열사다. 고려아연이 계열분리를 하기 위해서는 자본시장법상 특수관계인 지분을 3%만 남겨야 한다”면서 “최씨 가문이 장씨 가문으로부터 지분을 매입하는 데 드는 비용만 수조원 이상 될 것으로 본다. 현실적으로 볼 때 계열분리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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