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성》 더 클래식 30주년, 명곡 탄생의 비결
  • 김영대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3.23 15:00
  • 호수 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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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듯 서로 다른 매력 지닌 남성 듀오 김광진․박용준
짧은 활동 기간에도 자신들의 색깔로 90년대 가요계 장악

“김광진이 아름다운 선율을 써내려가면, 박용준은 그것을 음악으로 꾸미고 다듬어낸다.”

30년 전, 그들의 음반을 필자가 리뷰하면서 썼던 이 표현은 ‘더 클래식’이라는 팀의 정체성을 가장 심플하고도 정확하게 말해 준다. 가요사에서 더 클래식의 존재감은 독특하다. 이 둘이 음악 동료로 함께한 세월은 길었지만, 더 클래식의 전성기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는 것부터 그렇다.

3년 동안 3장의 앨범을 발표했다. 활동 기간 자체가 짧았고, 소위 대중적 히트곡이라 부를 수 있는 노래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더 클래식이 당대 음악팬들에게 남긴 임팩트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 시대의 정서를 지배했다고 말하면 과언일지 몰라도, 적어도 1990년대라는 ‘팔레트’를 만든 가장 중요한 색깔 중 하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래전 필자가 《90년대를 빛낸 명반 50》이라는 졸저를 쓰며 그들의 2집 앨범을 뽑아 리뷰한 적도 있지만, 나뿐만 아니라 적어도 1990년대 가요사를 정리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칠 수 없는 가수일 것이다.

데뷔 30주년 맞이한 더 클래식 김광진(왼쪽)과 박용준 ⓒ김광진 인스타그램 제공

가수 이승환 소개로 시작된 ‘더 클래식’

김광진과 박용준. 나이 차이도 있는 데다 개인적으로 큰 친분이 없던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었던 건 가수 이승환의 ‘중매’ 덕이었다. 생각해 보니 마치 1980년대 후반 이병우와 조동익 두 사람이 들국화 최성원의 권유로 포크듀오 ‘어떤 날’을 결성하게 된 스토리와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두 사람은 한동준의 음반을 녹음하며 처음 서로의 존재를 알았는데, 그 둘이 다시 이승환의 3집 앨범 ‘My Story’(1993)에 작곡가이자 편곡가로 함께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됐다. 김광진은 이승환의 《내게》 《Dunk Shot》 《Radio Heaven》 등을 작곡해 히트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고, 박용준은 같은 앨범의 《Radio Heaven》의 편곡자이자 《내 어머니》의 작곡가로 활약하며 최고의 세션 키보디스트이자 편곡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가까운데서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하는 것을 지켜본 이승환의 아이디어는 정확했다. 김광진의 멜로디 감각과 박용준의 편곡 능력이 만나면 더없이 좋은 시너지가 날 것으로 판단했고, 그 유명한 《마법의 성》이 수록된 더 클래식의 1집을 직접 제작해 이들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훗날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실린 《마법의 성》은 언뜻 동요같이 평범하게 들리는 곡이지만, 음악적으로 대단히 정교한 선율적 기교를 갖고 있는 곡으로 가요사에 손꼽힐 걸작이고, 더 클래식은 단숨에 ‘웰메이드’ 가요 트렌드의 선봉에 위치할 수 있었다.

더 클래식이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작곡가 김광진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음악적 비전이다. 한때 음악 하는 사람들 사이에 ‘멜로디는 김광진, 화성은 유희열’이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로 김광진은 가요사에 길이 남을 타고난 선율의 달인이다. 그 특징을 표현하기는 실로 어렵지만 기타리스트들의 선율에서 나오는 포크적인 자연스러움과도 다르고, 키보디스트들의 작품에서 종종 나타나는 난해한 멜로디의 구조와도 다르다.

김광진의 멜로디는 별다른 장식이 없이도 그 자체로 완성도가 있었고, 그 흐름이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했으며, 세련됐지만 그렇다고 과시하지 않는 친숙함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풍성한 서정미와 함께 복고적 애수미가 담겨있는데, 이름처럼 ‘클래식’한 그 정서는 당대의 다른 톱티어 음악가들과 뚜렷한 차이를 만들어냈다.

박용준은 누구나 인정하는 당대 최고의 키보디스트 중 한 명이었다. 조동진, 이승환, 윤종신, 박정현, 한동준, 성시경 등 유명 아티스트들의 음반에 건반주자로 참여했다. 수많은 콘서트에서도 키보드를 연주했던, 소위 가장 ‘잘 팔리던’ 연주자였다. 키보드는 물론 기타연주에도 탁월했고(키보디스트지만, 건반보다 기타를 더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짐), 장르 음악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기막힌 편곡 능력을 뽐냈다.

더 클래식이 전성기를 누렸던 19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한 아티스트가 특정한 장르에 구애받기보다는 장르와 장르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지른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제 막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한 현대적인 가요시장에서 뮤지션들이 느끼는 포부이자 욕심의 반영이기도 했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박용준도 그런 욕망을 품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음악계에 들어와서는 주로 포크 뮤지션들과 교류했지만, 다양한 장르의 편곡에 관심이 있었고, 특히 학창 시절부터 좋아했던 록 음악에 대한 동경도 함께 갖고 있었다. 더 클래식 1집의 《엘비나》, 2집의 《노는게 남는거야》, 3집의 《뭐하니?》 같은 트랙들에서 그런 소박한 로망이 잘 드러난다.

더 클래식 30주년 콘서트 ‘1994’ 포스터 ⓒ예음컬처앤콘텐츠 제공

아름다운 선율과 편곡으로 가요계 장악 

비록 《마법의 성》이나 《송가》 같은 서정적인 발라드 넘버들로 그들을 떠올리는 이가 많지만, 더 클래식의 음반에는 생각 외로(?) 실험적인 곡이 여럿 포진돼 있었다. 하지만 그 실험성이 당대에 서태지나 신해철 혹은 공일오비가 그랬던 것과 같은 파격적인 태도와 결합되지 않았기에 쉽게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광진 스스로도 아쉬움을 표현한 적이 있는데, 스스로는 늘 새로운 음악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음악을 늘 비슷비슷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것이 꼭 평단이나 대중만의 문제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모든 음악적 실험을 ‘형식적 파격’ 혹은 ‘저항적 태도’로부터만 찾으려는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더 클래식은 어쩌면 과소평가된 아티스트였다. 데뷔 시절부터 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에도 관심이 많았던 이들은 3집에서 《살리에르의 슬픔》 《어렵군요》(Melody For Quasimodo)와 같은 곡을 만드는데, 그중에서도 《살리에르의 슬픔》은 비틀스나 퀸 스타일의 사이키델릭한 편곡이 클래시컬한 연주와 어울린 명곡이었다. 당시 더 클래식이 갖고 있던 음악적 포부와 자신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더 클래식의 최고작으로 2집 타이틀곡인 《여우야》를 꼽는 데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 믿는다. 김광진의 낭만적인 송라이팅에 박용준의 기막힌 편곡이 어우러진 ‘클래식’으로 박용준의 키보드에 함춘호의 리드미컬한 기타, 조동익의 펑키한 베이스, 김영석의 정밀한 드럼, 정원영의 피아노 솔로가 거짓말처럼 어우러진 한국 세션 음악의 정점이라 부를 만하다. 게다가 흑인 중창단을 연상케 하는 소울풀한 코러스는 ‘낯선 사람들’이 맡았다. ‘꼰대’의 ‘라떼’ 같은 말이라 나무랄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 이런 음악이 당연한 줄 알았던 기적 같은 세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더 클래식의 두 사람, 김광진과 박용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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