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만 끝나나…온라인 ‘민원감옥’ 갇힌 공무원들
  • 정윤경 기자 (jungiza@sisajournal.com)
  • 승인 2024.03.28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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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새 9급 공무원 4명 세상 등져…입사 3년 안 된 30대 청년들
악질 민원 활개…접수 사이트 돌려가며 동시다발 민원 ‘폭탄’
출퇴근에 출장 기록까지…공무원 개인정보 들여다보는 민원인
3월18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과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이 악성 민원으로 희생된 공무원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전공노 제공
3월18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과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이 악성 민원으로 희생된 공무원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전공노 제공

지난달 26일 경남 양산에서 한 공무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4일에는 충북 괴산의 공무원이 임용 두 달 만에 세상을 등졌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경기 김포시청에서도 ‘사이버 괴롭힘’을 당하던 공무원이 숨졌다. 지난 20일, 경기 남양주시에도 신입 공무원이 사망했다.

한 달 사이에 공무원 4명이 목숨을 끊었다. 이들은 모두 젊은 30대이자, 입사한 지 3년이 채 안 된 9급 공무원이다. 또다시 동료를 잃은 공무원들은 정치권을 향해 일하다 죽지 않게 해달라며 인력 증원과 처우 개선, 악성 민원으로부터의 실질적 보호 방안을 촉구했다.

'민원인으로부터 들은 말 가운데 가장 충격으로 남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공무원의 답변 ⓒ전공노 제공
'민원인으로부터 들은 말 가운데 가장 충격으로 남은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공무원의 답변 ⓒ전공노 제공

도 넘은 악성 민원…지자체 내놓은 해법은 소형 카메라?

잇단 공무원의 안타까운 죽음에 지자체도 팔을 걷어붙였다. 민원 처리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에게 ‘웨어러블 캠’을 지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웨어러블 캠은 녹음과 녹화 기능이 탑재된 휴대용 채증 장비다. 악성 민원인이 공무원에게 폭언과 폭행을 시도하면 웨어러블 캠으로 증거를 수집하라는 취지다.

그러나 소형 카메라로는 공무원을 충분히 지킬 수 없다는 현장의 비판이 나온다. 5년 전부터 악성 민원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지자체가 웨어러블 캠을 지급해 왔지만 사태가 가라앉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박중배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 대변인은 “민원인이 폭언을 하면 중지 요청을 하고, 그래도 계속되면 ‘지금부터 녹음하겠다’고 고지한다. 그러면 민원인이 신경질을 내고 거부하는데 가당키나 하겠느냐”며 “웨어러블 캠으로 증거 수집을 할 수 있으니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되겠지만 실질적인 대책은 못 된다”고 털어놨다.

악성 민원의 행태가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변화하고 있어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숨진 김포시 공무원도 한 민원인으로부터 온라인상에 신상이 공개돼 온갖 항의성 민원에 시달렸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그의 실명, 소속 부서, 직통 전화번호가 삽시간에 퍼졌다.

문제는 온라인상에서의 ‘악질 민원’이 갈수록 활개를 치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 공무원에게 앙심을 품은 민원인이 온갖 사이트를 동원해 동시다발적으로 민원을 넣는 것이다. ‘국민신문고’ ‘안전신문고’ ‘구청장·시장에게 바란다’ ‘120다산콜재단’ 등 민원 접수가 가능한 사이트만 해도 국내에 수십여 곳이 있다.

‘거절할 권리’가 없는 공무원들은 일일이 응답을 해야 한다고 한탄했다. 답변을 하지 않았다간 ‘불친절 공무원’으로 분류돼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어서다.

김정채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사무총장은 “악성 민원을 민원으로서 존중할 것이 아니라 범죄로 규정해야 한다”면서 “악성 민원이 접수됐을 때 기관장이 적극적으로 고소·고발할 수 있도록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공무원을 향한 ‘신상털기’ 수법도 진화하고 있다고 했다. 공식 사이트에 접속해 공무원의 이름·사진·전화번호 등을 개인정보를 복사하는 것을 넘어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공무원의 출퇴근이나 출장 기록, 관용차량 사용내역, 초과근무기록까지 알아내 퍼나르는 것이다.

박 대변인은 “악성 민원인이 공무원에게 앙심을 품고 공익적인 목적이 아닌 자료를 한 트럭 분량에 달할 정도로 요구하기도 한다”며 “결국 변호사를 선임해 정보 제공을 거부한 적도 있다”고 호소했다.

최근 6년간 악성 민원 사례 ⓒ양선영 디자이너
최근 6년간 악성 민원 사례 ⓒ양선영 디자이너

3년간 스스로 목숨끊은 공무원의 유족급여 청구건수 67건

전공노로부터 제공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공무원 재해보상법이 시행된 이후 3년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공무원의 유족급여 청구 건수는 67건(승인 21건)이다. 또 지난 5년간 공무원 사망자 중 3분의 1이 ‘과로사’인 것으로 드러났다.

공무원들은 반복되는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인력’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 대변인은 “한정된 인력이 쏟아지는 민원을 처리하려면 버거울 수밖에 없다”며 “인력 충원을 하고 민원 처리 기간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민원처리법’을 다듬어 악성 민원에 대한 처벌이 엄격히 이뤄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현행 민원처리법 제4조(민원 처리 담당자의 의무와 보호)를 보면, 행정기관의 장은 민원인의 폭언·폭행 등으로부터 담당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만 나와 있다.

박 대변인은 “공무원에게 상해를 가하는 등 위해(危害)행위를 하면 벌금 또는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법을 손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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