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인물⑥] 스크린서 되살아난 프레디 머큐리
  • 송응철 기자 (sec@sisajournal.com)
  • 승인 2018.12.21 13:53
  • 호수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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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분야]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1020 관통하는 새로운 코드로

‘영국에는 두 명의 여왕(Queen)이 있다.’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 퀸의 위상을 잘 설명하는 말이다. 퀸은 그동안 국경과 시대를 초월한 사랑을 받아온 밴드다. 이런 가운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하면서 퀸의 인기가 다시 불타올랐다. 이 영화의 초기 반응은 뜨겁지 않았다. 주요 관객층인 20~30대가 퀸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극장가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기 위한 인파로 지금까지도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개봉 14일 만에 흥행 1위에 올랐고, 누적 관객 수는 최근 800만 명을 돌파했다. 국내 개봉한 음악영화 중 최초이자 최고 기록이다. 이제 시선은 1000만 명을 채울 수 있을지에 집중되고 있다. 

 

❶ 영국 런던에서 열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시사회에 퀸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왼쪽에서 두 번째)와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왼쪽에서 네 번째)가 참석했다. ❷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부적응자들을 위한 부적응자들의 음악”

《보헤미안 랩소디》는 퀸과 천재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는 ‘아프리카 출생, 아시아에서 보낸 젊은 시절, 양성애자와 에이즈’ 등 영국 사회에서 철저히 아웃사이더로 소외받아왔다. 영화에서 프레디 머큐리는 퀸의 정체성을 ‘부적응자들을 위한 부적응자들의 음악’으로 표현한다. 그런 프레디 머큐리가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의 스토리는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선사했다는 평가다.

퀸이 결성된 것은 1971년 영국 런던에서다. 프레디 머큐리, 브라이언 메이(Brian May, 기타), 존 디콘(John Deacon, 베이스), 로저 테일러(Roger Taylor, 드럼) 등 다섯 사람이 의기투합했다. 영화에서는 프레디 머큐리가 생면부지 밴드에 지원한 것으로 묘사됐지만, 실제로 그는 밴드 결성 전부터 로저 테일러와 가까운 사이였다.

퀸의 첫 앨범인 ‘퀸(Queen)’이 공개된 것은 1973년 7월이다. 영화에서처럼 처음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진 못했다. 대중 인지도가 낮다 보니 처음엔 다른 유명 밴드 공연의 오프닝 밴드로 참여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독자 활동을 벌인 것은 1974년 2월 두 번째 앨범인 ‘퀸Ⅱ(Queen Ⅱ)’를 발매하면서다. 영국과 미국 전역을 순회공연하면서 팬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3집 앨범인 ‘시어 하트 어택(Sheer Heart Attack)’을 내놓고 동양권으로 시선을 돌렸다.

퀸이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난 것은 1975년 4집 ‘어 나이트 앳 디 오페라(A night at the opera)’를 발표하면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가 타이틀곡이었다. 앨범은 그해 영국 앨범차트 1위에,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국 싱글차트 1위에 각각 올랐다. 같은 해 《보헤미안 랩소디》 홍보를 위해 제작한 영상은 세계 음악 업계에서 최초의 뮤직비디오로 간주되고 있다.

이후에도 퀸은 《아이 워즈 본 투 러브 유(I was born to love you)》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 《위 아 더 챔피언스(We are the champioms)》 《위 윌 락 유(We will rock you)》 《돈트 스톱 미 나우(Don’t stop me now)》 《라디오 가가(Radio Ga Ga)》 등 히트곡을 선보이며 전성기를 맞았다. 퀸은 영화의 1985년 하이라이트인 ‘라이브 에이드’에 출연하며 새로운 전설을 썼다. 에티오피아 난민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기획된 라이브 에이드는 세계 14억 인구가 시청한 전무후무한 무대였다.

퀸이 활동한 1970~80년대는 록 음악의 춘추전국시대였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딥 퍼플(Deep Purple),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 등 쟁쟁한 밴드들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시기다. 대세는 하드록과 메탈 음악이었다. 이런 가운데 퀸은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다. 오페라와 클래식은 물론 디스코를 접목시키기도 했다. 당시 퀸의 음악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퀸의 음악을 ‘잡탕’으로 표현하며 혹평하기도 했다. 대중의 외면을 받은 퀸의 앨범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퀸은 실험적인 시도로 영국 록 음악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퀸이 걸음을 멈춘 것은 1991년 11월24일 프레디 머큐리가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으로 인한 기관지 폐렴으로 사망하면서다. 프레디 머큐리는 사망 전날 에이즈 환자임을 스스로 밝힌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화에서는 ‘라이브 에이드’ 공연 전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론 공연으로부터 2년이 지난 1987년 그는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에도 프레디 머큐리는 눈을 감기 전까지 왕성한 음악활동을 벌였다.


모든 멤버가 작곡가 명예의 전당 오른 밴드

프레디 머큐리가 사망한 이듬해인 1992년 4월에는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Wembley Stadium)에서 ‘프레디 머큐리 트리뷰트 콘서트(The Freddie Mercury Tribute Concert)’가 개최됐다. 프레디 머큐리를 추모하는 공연이었다. 이날 공연에는 데프 레퍼드(Def Leppard),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 엘튼 존(Elton John),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익스트림(Extreme), 메탈리카(Metallica) 등 세계적 스타들이 참여했다.

퀸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퀸과 프레디 머큐리를 동일시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 그는 음악계에서 전설의 프런트맨(무대 전면을 누비는 사람)으로 꼽힌다. 노래는 물론 작곡, 연주, 퍼포먼스, 관객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등 빠지는 게 없다. 그러나 퀸은 결코 프레디 머큐리에만 의존하는 팀이 아니었다. 여러 히트곡이 다른 멤버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로 인해 퀸은 밴드 멤버 모두가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유일무이한 밴드로 기록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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