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말버릇, “술·담배·여자”…‘몸’으로만 해석돼 온 여성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1.12 16:00
  • 호수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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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여성을 바라보는 잘못된 인식들

어릴 적 이야기다. 동네에 한두 분씩은 다 있는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그런데 그 할아버지를 묘사할 때 따라붙는 이야기가 묘했다. “그 양반 평생 여자 모르고 살았지” “술, 담배, 여자를 멀리하셨어” “여자 보기를 돌처럼 했지” 기타 등등. 한 남자 노인의 고결함을 칭찬하는 문장 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멀리할 여자’. 

묘하다는 것은, 그 할아버지는 당연히 배우자도 있고 손주도 여럿 보신 분이셨거든. 평생 여자를 멀리하고 사신 분이라며? 그 할머니는 여자 아닌가?

이 말에 얽힌 비밀을 깨닫게 된 건 한참 나이 들어서였다. 여자란, 연애를 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일을 함께 하거나 하는 지정성별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성욕을 해결해 주는 대상으로서의 여성 육체를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성매매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될 일을 왜 굳이 ‘여자’라고 하지? 그 어법 속에 드러난 뿌리 깊은 여성 비하. 요즘 말로 여성 혐오가, 알고 나니 너무나 치욕스러웠다. 남자들에게 일반명사 여자란 술, 담배처럼 기호식품, 그러니까 먹을 것이며, 술, 담배처럼 살 수 있는 것이며, 공유도 하고 교환도 할 수 있는 일종의 상품이로구나. 수많은 남성들이 죄책감 없이 여성의 신체가 불법적으로 찍힌 동영상을 들여다보고 교환하며 소비하는가 하면 심지어 엄연한 여자친구라는 호명을 지닌 여성을 인증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남자들에게 전시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 또한, 여성을 교환가치로 바라보는 인습의 발현이 아니겠는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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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만 해석돼 온 여성

오랜 세월에 걸쳐 여성을 교환하고 여성을 분배해 온 문화는 여성을 육체에 예속된 존재로 보는 것에 익숙하다. 여자란 그러니까 일단 ‘몸’인 것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관습적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거의 무의식 수준에서 전승된 것이라 사용자 스스로 문제를 깨닫는 것이 쉽지는 않다. 남성들의 어법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여성들도 여성 혐오적인 언어에 물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났다 해서 저절로 성인지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를 조금 더 빨리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언어 그 자체를 다루는 문인들도 일부러 노력하지 않으면 성인지적 감수성이 낮기는 마찬가지다. 스스로 창의적이라 여긴 표현들이 사실은 오랜 성차별적 문화의 무의식적 발현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무의식이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려져 반성을 요구받는 것이 현 시대의 새로운 가치관이다. 무엇보다도 언어에 내재한 근본적인 성차별, 여성 혐오를 의식할 것을 요구받는다. 

일단 무의식의 언어습관을 점검하기 시작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법관들이 각성할 때 판결이 달라지고, 기자들이 각성할 때 기사의 사진이 달라진다. 우리의 문화는 지금 일상을 재구성 중이다. 

여담. 얼마 전 우연히 남편이 친구들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무슨 말 끝에, “나는 담배는 해도 술과 여자는 안 해.” 내가 지적을 했다. “여보, 여자라고 하는 건 잘못되었어. 여자가 어떻게 술과 담배와 동격이야?” 남편은 화들짝 놀라며 “그러네. 잘못되었네”라고 수긍을 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언어습관에 이의가 들어올 때, 판단해 보고 “내가 틀렸구나. 고칠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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