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을 잡을 게 아니라 재벌 비리를 잡아야 한다”
  • 김지영 기자 (you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7.0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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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30주년 특별기획 인터뷰] 《동학농민혁명사》 펴내는 ‘진보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①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⑩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⑪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 ⑫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⑬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⑭이종찬 전 국회의원 ⑮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⑯박관용 전 국회의장 ⑰송기인 신부 ⑱차일석 전 서울시 부시장 ⑲임권택 감독 ⑳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21이문열 작가 22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교수 23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 시사저널 최준필
ⓒ 시사저널 최준필

‘진보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그는 민중사와 민족사, 생활사 중심의 한국사 기술에 열정을 쏟아왔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한국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과 계간 《역사비평》 편집인도 역임했다. 특히 선생의 이력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연구 성과가 있다. 바로 동학농민혁명사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부터 동학농민혁명에 천착하며 대가(大家)가 됐다. 민간에서 구전되는 증언과 조선시대와 일본 등지의 기록물을 구석구석 추적했다. 그 결과 “정의와 평등, 자유를 위해 저항했던 ‘인간 전봉준’을 되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주역》의 대가셨던 야산(也山) 이달(李達) 선생의 넷째로 1937년 태어났으니 올해 83세다. 선생의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에 대한 연구 열정은 여전히 식을 줄 모른다. 세 권 분량의 《동학농민혁명사》(가칭)를 오는 9월 펴낼 예정이다. 정부가 지난 5월11일(1894년 동학농민군의 ‘황토현 전승일’) 처음으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을 주최하기까지 선생의 노고가 적지 않았다.

시사저널은 이이화 선생과 지난 6월26일 오후 2시부터 2시간가량 인터뷰했다. 2007년부터 부인과 함께 사는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 자택에서다. 이이화 선생과 취재진은 초면이었다. 선생을 대면하기 직전까지 가졌던 선생에 대한 기자의 선입견 하나는 ‘역사의 중량감만큼 근엄하시고 묵직하시겠지’ 하는 것이었다. ‘내 얄팍한 역사 상식이 들통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었다. 선생을 첫 대면하는 순간 이 선입견과 걱정은 와르르 무너졌다. 기우였다. 선생은 인터뷰 약속 시각 이전에 자택 앞에 나와 있었다. 취재진을 손수 마중 나왔다. 책 향기 물씬한 선생의 서재에서 인터뷰하며 기자는 취재수첩에 이런 느낌을 적었다. ‘옆집 할아버지’ ‘이야기보따리 아저씨’ ‘부드러운 사학자’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한’.

인터뷰 처음부터 과거 역사와 현재 논란거리로 들어가지 않았다. 대화의 실타래는 선생의 ‘문학청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풀어냈다. 선생은 인터뷰 중간중간 담배를 피웠다. 하루에 담배 한 갑 정도는 피운다고 했다. 술도 여전히 즐기신다며 웃었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6월26일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자택에서 ‘독수리 타법’으로 집필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6월26일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자택에서 ‘독수리 타법’으로 집필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가실 때만 해도 문학청년이었을 텐데, 역사학으로 바꾼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까.

“광주고등학교 학예부장, 문예반장 하면서 한때 문명(文名)을 날렸지(웃음). 문학 하려고 서라벌대에 갔고 1년 동안 학비를 면제받았어. 그때 (소설가) 김주영, (시인) 이근배 등 문우들이 수두룩해. 문학을 해 보니까 첫째 내가 다른 애들보다 뛰어나지도 않은 것 같았어. 다른 애들은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그랬어. 나는 한문 독해 능력도 좀 있고 해서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지. 우리가 식민지를 겪고 분단을 겪어서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어. 더군다나 일제 식민사관이니 뭐니 그런 얘기를 듣고서 ‘이걸 극복해야 될 게 아닌가’라는 사명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 20대 중반쯤에. 청소년 시절 문학 하겠단 꿈보다 역사 쪽으로 완전히 몰두했지.”

20대 때 역사를 공부하면서 당시 역사학자 중에 ‘이분 참 괜찮다’ 하는 분이 있었나요.

“조금씩 공부를 해 보니까, 이병도니 그런 사람이 싹 휩쓸었어. 교과서니 뭐니 전부 다. 공부를 더 해 보니까, 뭐 별거 아니더라고. 더 들어가 보니까, 민족사관인 신채호 선생 이런 분들을 좋아하게 됐지.”

생활고를 겪으면서 별별 일을 다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별걸 다 했어. 서울에서 아이스케키부터 빈대약, 가루치약도 팔았고 술집 웨이터도 했지. 가정교사도 했는데 하나 결점이 있었어. 내가 국어, 영어는 잘 가르쳤는데 수학이 약했거든. 학부형은 잘 몰라도 애들은 딱 알거든(웃음).”

1981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전문위원으로 좋은 조건에서 근무하시다가 갑자기 그만두셨는데, 왜 그러셨습니까.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편찬하는데 나를 서기관(4급 공무원)으로 스카우트했어. 박정희가 세운 곳이라 돈도 많이 주고 애들 학비도 다 대줬어. 큰 방을 연구실로 주고 대우가 아주 좋았어. 그런데 전두환이 와서 우리를 불러다가 막 강연을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백과사전에 박정희의 유신(維新)이니 뭐니 이상한 항목들을 집어넣고 그러더라고.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 짓거리들을 못 보겠더라고. 딱 1년 채우고 나왔지. 당시 원장이 나보고 나가지 말라고 타이르고 그랬어. ‘젊은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 ‘차분히 좀 있어라’ 그래. 그래서 ‘아니 저는 못 견디겠습니다’하고 그만뒀지. 당시 내가 (집필 활동으로) 좀 유명해진 것도 그만둘 수 있는 결심을 갖게 했어. 문명(文名)을 날리며 한창 막 떴을 때지. 요즘으로 치면 프리랜서를 해도 먹고살 만하겠다는 자신감도 있었어. 그래서 확 때려치우고 나왔지. 지금 생각해도 그때 머뭇거렸으면 대외적으로 이미지도 안 좋았을 거고, 그 일에 치여서 글도 못 썼을 거야.”

한국 근현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역사문제연구소’가 1986년 설립돼 소장을 맡기도 하셨습니다.

“연구소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다 만든 거예요. 돈을 전부 다 대고, 나한테 오라고 해서 갔지. (박 시장이) ‘이제 같이 일을 하자. 우리 진보 역사단체를 만들자’고 했어. 안 그래도 그거 막 하고 싶었던 차였어. 내가 열렬히 찬성해 가지고 같이 일을 한 것이지. 거기서 부소장도 맡고 소장도 맡고.”

박원순 시장이 당시는 변호사였는데 돈이 많았나보죠.

“박 시장이 다 대줬지. 건물까지 사줬어. 변호사로 잘나갔으니까 그때(웃음). (연구소 직원들) 월급 같은 것도 몇 명 줘야 하는데 박원순이가 다 부담했어.”

당시 전두환 정권의 감시와 탄압이 심했을 것 같은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연구소 일을 함께 했던) 이영희, 송건호, 강만길, 지금 돌아가신 분도 있고 살아계신 분도 있는데 그때 모두 민주투사들이잖아. 연구소가 (서울) 필동 대한극장 뒤에 있었는데 파출소에서 다 감시하는 거야. 우리가 지방에 답사를 가면 어떻게 알았는지 다 알고 따라왔어. 학술발표도 마찬가지였어. 또 우리 연구원들이 대학교수나 강사가 될 때도 많은 피해를 받았다고 볼 수 있지. 그래도 그땐 반독재 사명감이 있었어. 동지로서 우리끼리 딱 뭉친 거야. 아, 그 사람들 이제 출세했어. 이종석처럼 통일부 장관도 하고, 다 거기 출신들이야.”

이이화 선생은 외출할 때마다 조그마한 ‘담배 재떨이’를 휴대하고 다닌다. 6월26일 오후 서울에 약속이 있어 외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 시사저널 최준필
이이화 선생은 외출할 때마다 조그마한 ‘담배 재떨이’를 휴대하고 다닌다. 6월26일 오후 서울에 약속이 있어 외출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 시사저널 최준필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단체 조사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했을 때도 여기저기서 외압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많았지. 내 아는 사람, 우리 집안사람. 내가 연안 이씨인데 그중에도 친일파에 들어간 게 있어요. (문중 사람들이) ‘너 거기(역사문제연구소) 들어가 있으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친일명단에서 빼야 돼’ 어쩌고저쩌고. 그게 말이 되는가. 우리 집안사람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었어. 어떤 문중에선 나한테 전화해서 ‘우리 집안에 검사와 판사가 몇 명 있는지 아느냐. 너 같은 놈 10년 동안 감옥에 집어넣을 수도 있어’라고 했어. 어떤 사람은 ‘이 새끼 죽인다’고 막 공갈이 들어왔다니까.”

22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를 펴냈습니다.

“1994년 (출판사) 한길사에서 10년 동안 24권을 내기로 계약했지. 그때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때였어. (1997년) IMF 사태가 나면서 책도 안 팔리던 그런 시대였지. 출판사에서 생활비를 10년 동안 대주기로 했는데, 그걸로 생활이 안 돼. 그래서 중간중간 텔레비전에 출연도 하고 강의도 하고. 원래 24권을 낼 예정이었는데 근대사를 좀 줄이자고 해서 22권으로 냈지.”

집필하실 때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다른 건 아니고, 나이가 들고 이걸(컴퓨터 자판) 치는데 독수리타법으로 힘들었어. 우리 아들(영화감독 이응일)이 ‘그러지 말라’고. 근데 그걸 어떻게 다 손으로 써. (작가) 조정래는 직접 쓴다고 하는데 팔 안 아픈가 모르겠어(웃음).”

책은 많이 팔렸나요.

“많이 팔렸죠. 지금까지 한 50만 권 나갔어. 엊그제 (출판사에서) 또 연락 왔는데 3500부 더 찍는다고. (출판사가) 나한테 보너스도 안 줘(웃음).”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는데 북한에선 갑오농민전쟁이라고 합니다. 남북이 달리 해석하는데 어떻게 봐야 할까요.

“기본적으로 지금은 다른 거 없어. (8·15) 해방 직후 그 사람들이(북쪽 사람들이) ‘갑오농민전쟁’이라고 쓸 때 이쪽은(남쪽 사람들은) 전부 ‘동학난’이라고 썼어요. 초기에 내 진보적인 선배만이 아니라 후배까지도 북쪽 용어를 그대로 썼어요. 그래서 내가 ‘이제 정리를 해야 되겠다’고 제일 먼저 주장했어요. 그래 가지고 토론회도 해서 처음 결론 낸 것이 ‘동학농민전쟁’ 그다음에 ‘동학농민혁명’이었어요. 그리고 특별법을 만들 때 ‘동학농민군’ 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했어요. 이제 국가기념일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정해진 거죠. 이젠 굳어졌어요.”

‘전봉준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이이화 이사장이 이낙연 국무총리와 5월11일 오전 제1회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 앞서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전봉준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봉준장군 동상건립위원회’ 이이화 이사장이 이낙연 국무총리와 5월11일 오전 제1회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에 앞서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전봉준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내가 좌파? 좌파가 뭔지도 모르고 하는 말”

교과서에선 ‘동학농민운동’으로 돼 있는데요.

“정부는 지금 공식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쓰고 있어. 교과서는 국사편찬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거니까. 근데 그게 어정쩡한 이름이거든. 이제 바꿔야지.”

‘혁명’은 구(舊)체제가 바뀐다는 의미가 있는데, 동학농민혁명을 혁명으로 규정하는 게 맞나요.

“내가 간단히 요약할게요. 우리 진보 쪽이나 북한 이론이 (동학농민혁명은) 반(反)봉건, 반(反)침략이에요. 신분평등이라든가 토지 문제라든가 이런 게 포함돼 있어요. 이것은 반봉건이야. 프랑스혁명이나 미국 남북전쟁도 마찬가지야. 프랑스혁명도 100년이 걸렸어요. 동학농민혁명도 세계사적 의미가 있어. 여기에 일본 제국주의를 비롯해 서양 제국주의를 타파하는 반제(反제국주의) 투쟁이기도 해. 다만 조선왕조가 정식으로 타도된 것은 아니지. 그렇지만 그 정신은 3·1운동으로 내려온 거야. 천도교와 3·1운동, 이것은 동학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거야. 3·1운동을 왜 혁명이라 그러는가. 정권을 수립한 건 아니지만 임시정부가 들어선 거야.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헌법 기초엔 평등, 인권 모든 게 포함돼 있어. 그것도 ‘민국(民國)’이야. 제국이 아니라.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 이것부터 시작하는 거잖아. 동학농민혁명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거지. 이런 기본 흐름을 보면 동학농민혁명이라 해도 절대 무리가 아니야.”

남북 간 역사 해석 차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북한의 역사는 양면성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 주체사상, 주체사관이나 김일성 중심이야. 이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또 하나 그래도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게 있어. 평등 사회를 만든다든가 사회주의 이념이 반영돼 있어. 갑오농민전쟁도 그런 각도에서 그쪽에서 인정하는 거야. 3·1운동은 절반만 인정하고 절반은 인정을 안 해. 왜 그러냐. 김일성이 적극 참여 안 했기 때문이야.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했잖아. 우리가 김일성 주체사상을 따라갈 순 없어. 하지만 일제시대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독립투쟁을 했다는 거, 이런 부분은 우리가 인정해야 되는 거야.”

생님을 ‘좌파 역사학자’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보고 좌파, 좌파 하는데 좌파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독일에서 공부하는 우리 딸이 뭐라는 줄 알아. ‘아버지는 독일에서 (좌파) 그 중간도 안 된다’고. 독일은 사회주의 계통, 사회민주주의잖아. ‘이이화는 사회민주주의 쪽도 제대로 안 가는 사람인데, 그걸 뭐 좌파라 그러나’ 하는 말도 있어. 내가 ‘아, 그 말이 맞다’ 그랬어.”

의열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에 대한 서훈 문제로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데요.

“그것이 나 같은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 거야. 화가 나고. 이 약산이란 사람이 정말 진짜 독립투사야. 진짜 투사야. 우리가 이 김원봉을 다 발굴했어. 나도 글 썼어요. 영화가 뜨기 전에 학술 쪽에서 먼저 (연구했어요). 요새 (드라마) 《녹두꽃》이 막 뜨고 있는데, 그것도 우리가 다 (연구) 해 놓은 거야.”

김원봉은 어떤 인물입니까.

“(해방 후 김원봉은) 이승만의 분단 구조에다 친일파도 득세해 난리를 치니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거지. 김원봉은 침착한 성격이 아니야. 막 성질이 급하고 막 정의감이 넘치고. 막 안 되겠으니까 북한으로 넘어갔는데, 그 북한에서 준 것(공직)이 검열상이야. 그 검열상 아무것도 아니야. 우파들, 극우들, 박정희 도당들, 잔당들이 공부는 안 하고. 아휴, 공부 안 한 게 아니라 알면서도 억지를 쓰는 거지. 저 사람들은요, 이론이니 그런 거 없어. 정치권력을 어떻게 잡느냐 그것밖에 없어. 그러니까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야.”

문재인 정부에서 서훈을 주려는 의지가 강해 보입니다.

“서훈을 받아야 해. 늦어도 너무 늦었어. 잘못된 거지. 그런데 서훈법(法)도 고쳐야 해. 첩첩산중이지. 쉽게 되는 건 아니지. 이 정권에서 안 돼. 왜냐면 법을 고쳐야 하니까. 법을 고치려면 또 얼마나 복잡해.”

김원봉 외에도 서훈을 받아야 할 사람이 더 있다면, 누가 있습니까.

“여운형도 서훈을 늦게 인정받았는데,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들은) 다 받아야 돼. 사회주의자들도 항일투쟁을 정말 열렬히 한 사람들이야. 김두봉도 마찬가지야. 무정(장군)이라든가.”

“文정부, 적폐청산 제대로 안 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을 그만두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지금 적폐청산을 제대로 안 한다고 봐요. 적당히 하고 마는 거야.”

어떻게 해야 제대로 적폐청산 하는 겁니까.

“첫째가 재벌의 비리를 잡아야 돼. 재벌을 잡는 게 아니고 재벌 비리를 잡아야 한다는 거야. 자본주의 국가에서 재벌은 용납되는 것이고 다 그들의 경제활동을 인정해. 그렇지만 법을 어긴 비리가 있잖아. 진짜 적폐가 있잖아. 그걸 왜 안 잡아. 또 사법·검찰 개혁도 안 해. 경찰 개혁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돼요. 김대중, 노무현이 다 실패한 거야. 비리는 때려잡아야 해. 세금 포탈 이런 거 다 잡아야 돼. 그걸 내버려두고 적폐청산을 어떻게 해. 검찰 개혁도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부정부패했는지 그걸 때려잡아야 해. 경찰도 마찬가지고. 이걸 제대로 안 잡으니까 하는 둥 마는 둥 돼 버리고 (검경이) 말도 안 들어. 민주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 비리를 없애야 해. 근데 그걸 안 하잖아.”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역사를 너무 모른다고 지적하기도 하는데, 역사는 왜 중요합니까.

“어려울 때일수록 역사가 더 중요해요. 역사 교훈을 받아서 그때 누가 무슨 일을 했나,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나, 배우고 반성하고, 이게 중요한 거야. 우리가 (민주화) 운동할 땐 모여서 막걸리 마시며 막 분개하고 그랬어. 청년의 패기가 있었어. 그런데 (요즘은) 너무 나약해. 부모들이 애들을 무슨 의식을 갖게 키우지 않아. 사회 참여라든가 질서라든가 그런 교육은 안 하고 말이야. 출세, 돈 버는 이런 데로 막…. 앞으론 재벌도 바로잡아야 되고 빈부격차도 바로잡아야 돼요. 젊은이들 의식이 조금 더 (사회) 참여 쪽으로 가야 돼요. 그걸 어디서 배우느냐. 역사에서 배우는 거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과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 등으로 한·일 관계가 얼어붙어 있습니다. 한·일 갈등 원인은 무엇입니까.

“독일과 프랑스는 원수 사이였어. 그러다 화해했고 아주 좋은 관계로 발전하고 있잖아. 일본이 ‘군국주의 때 인권탄압이 있었다. 잘못했다’ 이렇게 인정을 해야 하는 거야. 그럼 아무 탈이 없잖아. 그런데 일본은 군국주의를 청산하지 않았어. 결국 미국의 실수야. 미국이 (2차 대전 후) 일본 헌법을 인정할 때 평화헌법까진 좋았어. 그런데 천황제까지 인정한 거라고. 그때 천황제를 없애버려야 했어.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천황이 정신적 심벌(상징)처럼 돼 있어.”

경색된 한·일 관계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일본에 새로운 정권이 나와야 해. 아베 (총리) 같은 사람 말고. 새 정권이 ‘진짜로 반성한다. 이제 화해하자’고 해야 해. 그리고 일본이 국력이 있으니 보상도 하고. 돈이야 그거 몇 푼 안 돼. 자기네 체면 때문에 그렇지. 우리의 통일도 걸림돌이야. 완전한 통일은 아니더라도 느슨한 통일이라도 하면 분위기가 달라질 거야. 머지않아 (남북이) 서로 인적·물적 교류하고 불가침조약 맺게 될 거야. 그렇게 한반도 정세가 바뀌면 일본 정세도 바뀔 가능성이 있어. 앞으로 두고 봐.”

2007년 11월8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이화) 주최로 경복궁 흥례문 앞 광장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13주년 기념대회에서 동학군 후손들과 진압군 후손들이 113년 만에 화해를 한 뒤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07년 11월8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이이화) 주최로 경복궁 흥례문 앞 광장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13주년 기념대회에서 동학군 후손들과 진압군 후손들이 113년 만에 화해를 한 뒤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이화 선생의 부친은 《주역》의 대가 이달 선생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부친 야산(也山) 이달(李達) 선생은 《주역》의 대가다. 1889년 태어난 이달 선생의 고향은 경북 김천. 연안 이씨의 집성촌이다. 독학으로 유교, 도교, 불교 등을 두루 섭렵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주역》에 통달해 후학을 양성했다. 김천에서 대구로 나간 선생은 미두(米豆) 사업을 했다. 현물 없이 쌀을 거래하는 것으로 요즘의 증권시장과 유사한 형태다. 돈을 많이 벌어 광산을 사들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강원도 철원에 가서 집단농장을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런 와중인 1937년에 이이화 선생이 넷째로 태어났다. 이달 선생은 사업을 접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선생은 1945년부터 전북 전주와 충남 논산 중간에 있는 대둔산에 들어가 3년 살았다. 제자 108명을 가르쳤다. 이후 충남 안면도로 이사 갔다. 선생을 따라 무려 300여 호(戶)가 이사를 왔다. 당시 안면도는 외떨어진 섬이어서 한국전쟁 화마가 비껴갔다. 한국전쟁 중 산골이었던 충남 부여군 은산면으로 이주했다. 재력 있는 그 지역 유지가 선생에게 강당을 지어줬다. 거기서 ‘삼일(三一)학원’을 열어 제자들에게 《주역》을 가르쳤다. 그러다 다시 부여 읍내로 이사했다. 그러자 제자들도 선생을 따라 이사했다. 이이화 선생은 “제자들이 수백 호(戶)에 달했다”고 말했다. 제자들과 당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한광석씨 등이 “땅을 만들어줬다”. 부여군 동남리 백제탑 부근 요지였다. 거기에 집을 짓고 또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선생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지면서 충청도 일대 한학자 등이 선생을 찾아왔다. 선생은 1958년 부여에서 돌아가셨다. 야산 선생이 가르친 제자만 1만2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이화 선생은 부여에 살 때 가출했다. 사연은 하나. “학교를 안 보내줘 가지고”였다. 이이화 선생은 “(아버지께서) 나한테 한문만 가르치시고 학교엔 안 보내주시는 거야. 내 나이가 15살 되니까, 학교 다니는 게 막 부러웠어. 교복 입은 중학생들이 모자 쓰고 하얀 교복 입은 여학생들이 운동화 신고 돌아다니는데 나는 바지저고리 입고. ‘한문을 공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몰래 나와 가지고 학교를 다닌 거야”라고 회상했다. 이이화 선생은 부평초처럼 떠돌다 광주고를 나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생활고로 1년 만에 학업을 접어야 했다.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독학으로 역사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부친 이달 선생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묘비와 별도로 선생을 추모하는 강역비(講易碑)를 부여에 세웠다. 야산 선생이 1946년 대둔산에서 창립한 ‘홍역(洪易)학회’ 명맥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야산의 제자인 대산 김석진 선생이 이를 계승해 1987년 다시 학회를 창설했다. 2000년엔 한국홍역학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2008년 11월엔 ‘야산 이달 선생 서거 50주년 학술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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