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플공화국] 잡고보니 엄마·아빠·부장님…4060 ‘시니어 악플러’의 민낯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19.11.04 10:00
  • 호수 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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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자료 입수·분석…2017년 이후 10대 악플러 줄고 60대 악플러 늘어

‘악플’(악성 댓글)은 ‘흉기’다. 사회 각계의 공인들이 날 선 악플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버리는 비극이 반복되면서, 인터넷에서는 ‘악플러’의 정체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과연 누가, 왜 악플을 다는 것일까. 시사저널은 최근 3년간 사이버 명예훼손·모욕죄로 신고당한 악플러들의 연령별 현황을 입수해 분석했다. 그 결과 최근 대한민국을 ‘악플 공화국’으로 변모시킨 건 철없는 10대가 아닌 성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레이 악플러’, 이른바 40~60대 ‘시니어 악플러’들이 크게 늘면서 관련 사이버 피해 사례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기업 부장님부터 정년을 앞둔 공무원, 손자 사진을 SNS 프로필 사진으로 올린 할아버지까지…. 이들은 어쩌다 인터넷 공간을 좀먹는 악플러가 된 것일까. 시사저널은 실제 이들을 마주했던 변호사와 경찰 수사관, 범죄심리학자 등을 만나 시니어 악플러의 사례와 현황을 분석해 봤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실제 악플러를 고소한 피해자 K씨와 처벌을 받게 된 가해자 P씨의 사례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 일러스트 정재환
ⓒ 일러스트 정재환

공무원에서 전과자로…악플러 P씨의 사연

# ‘OO병원장 K’, 이 버젓한 명패 하나 얻기 위해 30년 가까이를 일했다. 딸은 나와 같은 길을 걸으려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삶, 크리스천으로서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지역 한 고아원과 복지재단에 5000만원씩 기부했고, 쌀도 몇 포대 보냈다. 지역 신문을 통해 작게 기사가 났다. 주요 포털사이트에도 노출됐다. 문제는 다음 날 터졌다. 기사 댓글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남긴 글 하나가 화근이 됐다. ‘K가 병원비 횡령하려고 돈세탁을 했다. 쟤 맨날 룸살롱 다니는 거 동네 개도 안다.’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다. 사실도 아니었고, 댓글도 금방 묻히려니 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갈무리된 댓글이 주변 지인들과 병원 관계자들 사이에 돌기 시작했다. 가족조차도 나를 의심하는 눈치다.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 모두가 수군거리는 것처럼 느껴져 매일 다니던 실내골프장마저 갈 수 없었다. 스트레스성 위궤양과 탈모가 찾아왔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저 XX 잡고야 말겠어.’ 그렇게 1개월을 끙끙 앓다가, 나의 선행을 악몽으로 바꿔버린 악플러를 고소했다.

# ‘계장 P’, 9급 공무원에 합격해 20년 넘게 일해 얻은 직책이다. 공무원으로 일하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뤘다. 주말마다 조기축구회에 나가 공을 차는 게 낙인데, 어느 날 조기축구회 단체채팅방에 기사 하나가 올라왔다. 우리 지역 OO병원장이 기부를 했단다. 방에 있던 형님 하나가 ‘팔자 좋은 X 부럽네ㅋ’라고 글을 쓰자, 다른 아우가 ‘저 X들 뒤로 더럽게 놀고 남은 돈으로 생색내는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럼 그렇지. 기사에 댓글을 썼다. ‘K가 병원비 횡령하려고 돈세탁을 했다. 쟤 맨날 룸살롱 다니는 거 동네 개도 안다.’

그렇게 잊고 지냈다. 단체채팅방에 공유되는 각종 기사들마다 댓글을 습관처럼 다는 터라, 내가 어떤 기사에 무슨 댓글을 달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내 댓글에 누가 공감이라도 눌러주는 날이면, 그게 또 희열이 있었다. 그런데 한 달 뒤,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악플 탓에 고소장 접수됐어요.” 뭐지? 댓글을 단 기사가 너무 많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자 경찰이 내 댓글을 한 자 한 자 읽어줬다. 이어 조서를 써야 한다며 경찰서에 직접 나오란다.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나? 머리가 하얘졌다.

 

서로 일면식도 없지만, 고소인와 피고소인으로 마주하게 된 50대 동년배 K씨와 P씨. 이 ‘3류 소설’ 같은 일화는 지난해 한 지방에서 발생했던 실제 고소 사례다. 고소 뒤 P씨는 12장이 넘는 반성문과 300만원의 돈으로 합의를 애원했지만, K씨는 변호사를 통해 ‘절대 선처는 없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결국 고소가 이뤄지고 5개월 뒤, P씨는 피고인이 되어 판사 앞에 섰고 ‘벌금 100만원’이라는 판결을 받아들었다. 당시 K씨가 선임했던 변호사는 “K씨가 P씨의 신상을 알고 정말 허탈해했다. 자기한테 원한이 있거나, 어린애들 장난이라 생각했는데 둘 다 아니었다”며 “결국 P씨가 범죄 전력이 없고 잘못을 반성하고 있다는 점이 참작돼 약한 벌금형을 받게 됐다. K씨는 우울증까지 걸렸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피해 입증이 안 돼 패소했다”고 전했다.

ⓒ 시사저널 임준성
ⓒ 시사저널 임준성

해마다 늘어나는 ‘4060세대 악플러’

실제 ‘악플’ 사건으로 경찰서에 오는 가해자 중 상당수가 P씨 사례와 유사하다는 게 경찰·변호사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중년을 넘은 나이에 자신과 관계없는 대상과 사건에 대해 근거 없는 음해성 악플을 다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청이 공개한 ‘사이버 모욕죄 및 명예훼손 신고 현황’에 따르면 2014년 8880건이던 악플 관련 신고는 2015년 1만5043건으로 두 배 가까이 크게 늘었다. 이후 △2016년 1만4908건 △2017년 1만3348건 △2018년 1만5926건으로 월 평균 1000건 이상씩 악플 신고가 접수됐다. 올해 역시 지난해와 비슷한 추이를 보이고 있다. 올해 1~9월까지 사이버 모욕죄 및 명예훼손 신고 건수는 1만2432건으로 집계됐다.

과연 신고를 당한 가해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시사저널이 경찰청으로부터 입수한 최근 3년간(2017~2019년 9월) ‘사이버 모욕죄 및 명예훼손 피의자 연령별 현황’에 따르면, 2년 전 악플 가해 혐의로 경찰서를 찾은 악플러 3명 중 1명은 20대였다. 2017년 악플 가해자의 연령별 비중은 △10대 13.90%(1718명) △20대 33.06%(4087명) △30대 21.66%(2678명) △40대 16.25%(2009명) △50대 10.60%(1310명) △60대 이상 4.54%(561명)였다. 악플러의 성별이나 직업은 따로 분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이 공개를 거부했다.

2018년에는 ‘악플러 나이’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전체 악플 관련 사건이 증가한 가운데, ‘10대 악플러’는 감소한 만큼 ‘60대 이상 악플러’가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동시에 20~30대 비중은 줄어들고 40~50대 비중은 늘어났다. 2018년 악플 가해자의 연령별 비중은 △10대 9.67%(1395명) △20대 31.33%(4517명) △30대 23.84%(3437명) △40대 17.32%(2497명) △50대 11.63%(1677명) △60대 이상 6.21%(896명)로 집계됐다. 

올해 역시 악플러의 ‘고령화’는 계속되고 있다. 경찰이 지난 1~9월까지 집계한 악플 가해자의 연령별 비중은 △10대 9.31%(1077명) △20대 28.91%(3343명) △30대 23.99%(2774명) △40대 18.32%(2119명) △50대 13.45%(1556명) △60대 이상 6.02%(696명)였다. 최근 2년간 악플 가해자 중 10~30대 비중이 68.62%에서 62.21%로 감소하는 사이, 40~60대 이상 비중은 31.39%에서 37.79%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악플 탓에 ‘억대’ 소송 직면하기도

‘시니어 악플러’의 표적이 돼 실제 고소에 나선 공인들의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연예계와 재계, 정계의 공인들을 괴롭혔던 악플러 중 상당수가 중년의 성인이었다. 자신과 관계는 없지만, 싫고 밉다는 이유로 수위 높은 댓글을 단 게 화근이 됐다. 일례로 지난 2012년 배우 최여진씨는 '고생 없이 자란 부잣집 딸’이라는 루머를 퍼뜨린 안티팬 때문에 힘들었던 사연을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최씨는 "사이버수사대에 의뢰해 악플러를 찾았는데 40대 중반의 아주머니였다. 매니저가 이유를 물었더니 '그냥 얄미웠다'고 했다. 그래서 '나에 대해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재계도 예외는 아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동거인에게 지속적으로 악플을 달았던 60대 주부가 억대의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지난 9월2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김병철 부장판사)는 최 회장의 동거인 A씨가 김아무개씨 등 9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김씨 등의 불법행위로 A씨가 정신적 고통을 받았음이 명백한 만큼 정신적 손해를 금전으로 배상할 책임이 있다”며 김씨에 대해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A씨는 63세 가정주부로 2017년 '조강지처 뿔났다'라는 카페를 만들고 최 회장이 횡령 혐의로 교도소 수감 중 특별 면회를 통해 동거인을 임신시켰다는 악플을 달았으나 허위 사실로 드러났다. A씨는 또 한 외신 특파원을 겨냥해 최 회장에게 동거인을 소개한 '꽃뱀'이라는 취지의 악플을 단 일로 작년 11월 대법원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확정됐다.

지난해 6·13 지방선거 당시 배현진 전 MBC 《뉴스데스크》 앵커(현 자유한국당 저스티스리그 대변인)에게 악플을 단 혐의로 한 50대 남성이 유죄·벌금형을 판결받기도 했다. 배 대변인이 SNS를 통해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50대 남성은 선거를 앞둔 5월24일 당시 배현진 후보 관련 인터넷 기사에 ‘줄 한번 잘 서네 극혐이다’ ‘한국당 개가 되어 잘 짖어주는구나’ 등의 댓글을 단 혐의로 기소됐고, 법원은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악플 범죄자 10명 중 2명만 합의 성공해”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를 보면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만일 사실이 아닌 거짓 정보를 유포한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악플 탓에 기소될 경우 합의는 쉽지 않다는 게 법조인들의 전언이다. 김경은 변호사는 “악플 탓에 변호사를 찾는 고소인은 심적으로 굉장히 지쳐서 오기 때문에 대부분 합의 과정을 거부한다”며 “보통 10건 중 2~3건만 합의에 이르고 나머지는 약식기소돼 벌금형에 처해진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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