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사장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20.07.09 10:00
  • 호수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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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안해요, 리키》가 보여준 플랫폼 노동의 민낯

희망이 배송됐다. 사장님이라고 했다. 출근 카드도 없고 목표 실적도 없다. 당연히 고용계약도 없다. 무릇 사장님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야 사장님이다. 이런 말이 뒤따른다. “당신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자신 있어요?’라는 질문에 “그럼요! 이런 기회를 얼마나 기다렸는데요”라고 답한다. 그렇게 택배기사 사장님이 됐다. 사장님이 됐으니까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준비했다. 아내에게 출퇴근용으로 쓰던 차를 팔아 택배용 밴을 장만했다. 걱정도 되지만, 열심히 일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금방 돈을 모아 아내에게 새 차도 사주고, 집도 마련할 수 있으리라. 희망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영화사 진진
ⓒ영화사 진진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희망적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리키는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고된지도 모른 채 밤낮으로 일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절망이 배송된다. 그가 예상했던 택배 수입은 하루 14시간씩 주 6일을 일해도 벌까 말까 한 돈이었다. 그것도 밥 먹을 시간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리키는 소변을 차에서 페트병에 본다) 쳇바퀴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며 일해야만 가능했다. 2분 이상 운전석을 비우면 경고음이 울렸다. 배달원 위치와 도착 예정 시간을 실시간으로 회사에서 보내는 단말기는 족쇄 같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쉽지 않았는데, 현실은 훨씬 더 잔혹했다. 

‘노동자’가 아닌 ‘사장님’은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배송 물건이 도난·분실되면 그 비용은 다 사장님 몫이다. 1분이라도 빨리 배송을 하기 위해 잠시 길가에 주차를 하면 어김없이 범칙금 딱지가 붙는다. 더 큰 문제는 아파도, 가족에게 급한 일이 생겨도 리키가 단 하루, 아니 반나절 휴가를 내는 일이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사고를 친 아들을 위해 반나절 일을 쉬면, 반나절의 보수 5만원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대체 기사 비용 5만원이 추가로 나간다. 돈을 써도 대체 기사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잔뜩 밀려 있는 차의 할부금은 매달 ‘총알 배송’처럼 청구된다. 쉬려야 쉴 수가 없다. 회사는 그 어떤 리스크도 나눠 지지 않는다.

그사이 리키의 자녀들은 위태롭다. 어린 딸은 자꾸 다투는 부모 사이에서 불안 증세로 밤잠을 자지 못한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아들은 유일한 취미생활인 그래피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남의 물건에 손을 대고, 학교를 밥 먹듯 빠져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자녀들과 대화하며 저녁식사 한 끼를 하고 싶지만 리키도, 역시 플랫폼 사장님(요양보호사)인 리키의 아내도 그러기 쉽지가 않다. “아빠가 이럴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어, 여보” “진짜 시간이 없다니까!” 리키의 가족은 계속 이런 대화만을 주고받는다. 사장님 가족은 그렇게 점점 위태로워져만 간다.

영화를 만든 켄 로치 감독은 돈 레인이라는 영국 택배기사의 실제 사례에서 영화를 착안했다. 당뇨병이 있던 레인은 일을 하루 쉴 경우 발생하는 비용을 피하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고 계속 일했다. 자신의 배달을 대신해 줄 기사도 찾지 못했다. 결국 레인은 택배가 가장 몰리는 크리스마스 때 사망했다. 사인은 과로였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한국에도 수많은 리키가 있다. 못지않게 애달픈 사연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정부는 플랫폼 노동자 규모조차 제대로 집계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한국노동연구원이 전체 취업자의 1.7~2.0%에 해당하는 47만~54만 명 정도일 것이라는 추정치만 내놓았을 뿐이다. 공식 통계조차 없으니 제도적 대안은 깜깜 무소식이다.

그동안 우리의 수많은 리키는 다치고, 쓰러져 간다. 얼마나 많은 플랫폼 노동자가 다치고 쓰러지는지조차 알 수 없다. ‘당일 배송’과 ‘총알 배송’이 당연해진 시대, 이를 위해 누군가가 다치고 쓰러지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혁신일까. 영화에서 택배회사 관리자는 리키에게 “네가 갖다주는 물건에만 관심이 있지. 누가 네게 관심을 두냐”고 말한다. 정부조차 뒷짐을 지고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 키우기에만 급급한 시대, 플랫폼 노동자들은 서로 이렇게 위로한다. “모두들 몸도 마음도 파손주의입니다.”(책 《까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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