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 대부에서 최장기 ‘소통령’…끝내 비극의 주인공 된 박원순
  • 이민우 기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20.07.10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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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 9일 연락두절 이후 북악산서 목 매 숨진 채 발견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끝내 대한민국 국민들은 '소통령'으로 불리는 현직 서울시장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다. 최초의 3선 서울시장, 최장기 서울시장을 역임해 대권주자로 분류됐던 그였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10일 끝내 숨진 채 발견된 박원순 서울시장의 얘기다. 향년 64세.

박 시장은 10일 자정을 갓 넘긴 무렵 서울 성북구 북악산 숙정문 인근에서 끝내 숨진 채 발견됐다. 전날부터 수색에 투입된 소방구조견이 목을 맨 채 싸늘히 식어 있는 박 시장의 주검을 발견했다.

박 시장의 딸은 전날 17시17분쯤 경찰에 실종 신고를 접수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600여 명 이상을 투입해 박 시장의 휴대전화 기록이 끊긴 북악산 일대를 수색했다. 폐쇄회로(CCTV) 확인 결과, 박 시장은 전날 10시44분쯤 서울 종로구 가회동 소재 공관에서 나왔고, 10시53분쯤 와룡공원 일대에서 모습이 포착됐다. 박 시장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시사저널 이종현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시사저널 이종현

시민운동의 길에서 정치의 길로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은 정치에 입문하기 전 시민운동의 '상징'으로 불렸다.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작은 할아버지의 양손으로 입양됐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지만 유신체제 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제적 당했다.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임용됐으나 6개월 만에 사표를 낸 뒤 1983년부터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국내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를 결성을 주도해 시민운동의 절정기를 이끌었다. 특히 2000년 16대 총선에선 부정부패 혐의를 받는 정치인들을 낙선시키기 위한 '낙천·낙선운동'을 주도해 86명 가운데 59명의 국회 입성을 막는 저력을 발휘했다. 2001년에는 아름다운재단을 만들어 기부운동을 전개했고, 2006년에는 희망제작소를 설립해 상임이사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2000년 4월 총선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박원순 서울시장(가운데)이 서울 강동구의 한 예식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나라당 강동을 김중위 후보의 낙선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0년 4월 총선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던 박원순 서울시장(가운데)이 서울 강동구의 한 예식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나라당 강동을 김중위 후보의 낙선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권에 입문한 것은 2011년이었다. 당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서울시장에 도전해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현 미래통합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선거 초반 박 시장의 지지율은 미미했지만,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극적인 양보로 단숨에 정치권 한복판에 들어왔다.

박 시장은 2014년과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2011년 재보궐 당시 득표율(53.4%)보다 높은 득표율로 3선에 성공했다.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었다. 올해까지 1000만 서울시민을 이끌며 최장기 민선 서울시장이란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2013년 3월17일 안철수 당시 국회의원 후보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정동 달개비 식당에서 만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2013년 3월17일 안철수 당시 국회의원 후보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정동 달개비 식당에서 만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화려하지 않지만 꼼꼼한 행정가로서의 3180일

박 시장은 화려하지 않지만 꼼꼼한 행정가였다. 보여주기식 대형 사업보다는 생활 속 변화를 이끄는 것에 집중해 '디테일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시민에게 베푸는 시정을 펼치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대표적인 변화는 재건축 정책이었다. 박 시장 재임 전 서울은 재건축 열풍이 불었다. 선거 때마다 재건축 공약이 남발됐고, 시민들도 호응했다. 하지만 박 시장은 기존 주민들을 변두리로 내쫓는 재건축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대신 오래된 주거 환경을 개선해 기존 주민들이 계속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책 방향으로 선회했다.

특히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전격적으로 투명한 정보공개를 단행해 시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덕분에 한동안 대권 주자 선호도 1위에 오르는 저력을 발휘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6월22일 서울시청에서 긴급브리핑을 갖고 "3일간 하루평균 확진자수가 30명을 넘거나 (병원) 병상가동률이 70%를 넘으면 종전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울시 제공
박원순 서울시장이 6월22일 서울시청에서 긴급브리핑을 갖고 "3일간 하루평균 확진자수가 30명을 넘거나 (병원) 병상가동률이 70%를 넘으면 종전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아갈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울시 제공

그에게 서울시장 3선은 독이었을까. 서울시장으로 너무 오래 재직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신선함이 떨어졌다. 대권 주자 지지율은 좀처럼 반등하지 못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개발, 오세훈 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같은 '한 방'이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박 시장은 그런 지적에 "정치적 한 방을 보여주는 대형 사업보다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내 삶을 바꾸는 게 정치라고 생각한다"며 소신을 지켜왔다.

박 시장의 마지막 정책도 '서울판 그린뉴딜'이었다. 사망 이틀 전 박 시장은 "세계가 혼란스럽고 방황할 때 저희는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가면 새로운 산업화는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코로나19 이후를 내다보는 대대적 친환경 정책의 밑그림을 내놨다. 그게 그의 마지막 정책이 될 것이라 여긴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시장 집무실에 설치된 도시현황판을 보며 5월12일 현재의 서울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박원순 서울시장이 시장 집무실에 설치된 도시현황판을 보며 5월12일 현재의 서울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박원순 서울시장은 누구

△1956년 경남 창녕 출생 △1974년 경기고 졸업 △1975년 서울대 중퇴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1982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1983년 변호사 개업 △1995~2002년 참여연대 사무처장 △2001~2010년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2006~2011년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2011~2020년 7월 제35·36·37대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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