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비 오니까 빨리 돌자”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8.24 09:00
  • 호수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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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한국전쟁 시기 한 집안을 짓누른 좌우 갈등 상황을 장마에 빗대 그려낸 윤흥길의 단편소설 《장마》의 첫 대목에 나오는 문장이다.

소설 속 표현처럼 때론 몽근 알갱이가 되어, 혹은 두려움의 결정체가 되어 우리를 괴롭혔던 긴 비가 마침내 그쳤다. 역대 최장기로 기록된 장장 54일간의 장마였다. 강한 비구름이 한반도를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는 사이, 땅은 폭우에 할퀴었고 사람들의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누군가는 물살에 떠밀려 아까운 목숨을 잃었고, 더 많은 누군가는 집을 잃고 가축을 잃고 논밭 위에서 익어가던 ‘미래’를 잃었다.

이 질기도록 긴 장마에 사람들을 지치게 한 것은 비뿐만이 아니었다. 정치 또한 엉뚱한 생채기를 보탰다. 일부 정치권 인사가 느닷없이 소환한 ‘4대강 사업’이 그것이다. 장마 막바지, 섬진강 유역인 전남 구례에 큰 수해가 발생하자 야권 정치인들이 “섬진강이 4대강 사업에 포함되지 않아 비 피해를 크게 입었다”는 말로 먼저 포문을 열었다.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여기에 가세해 수해 현장에 직접 가서 “4대강 사업(을 한) 어느 지역에서 물난리가 났습니까? 4대강 사업 한 곳은 낙동강 일부 지역 빼고 수년간 범람이나 물 피해가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효섭 낙동강홍수통제소장이 2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호상 금강홍수통제소장(가운데)과 김규호 영산강홍수통제소장(오른쪽)이 답변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효섭 낙동강홍수통제소장이 2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호상 금강홍수통제소장(가운데)과 김규호 영산강홍수통제소장(오른쪽)이 답변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정권 시기에 시행된 4대강 사업은 아직까지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혈세 낭비’ 등 비판도 여전하다. 그런 만큼 당시 정권에 관여했던 이들로서는 섭섭한 마음이 클 수 있다. 하지만 심각한 수해 상황에서 그처럼 논쟁의 여지가 큰 정치적 언어를 꺼내는 것이 옳았는지는 다른 문제다. 재해를 맞아 눈앞이 캄캄해진 수재민들 앞에서 할 얘기는 결코 아니다.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미래의 일일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특히 피해를 어떻게 복구할지, 재발을 막기 위해 어떤 조처를 취할지를 논의하는 것이 우선이다. 홍수 예방을 따지려면 이미 설치돼 있는 4대강 보가 아니라 아직 허술한 채로 있는 지류·지천의 제방 문제를 먼저 말해야 한다.

4대강 사업이나 이번 폭우 때 산사태를 부추겼다는 논란에 휩싸인 ‘산지 태양광 시설’ 등은 정치의 언어로 말할 소재가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해 대처하면 된다. 과학적인 근거를 외면한 채 나오는 정치의 언어는 오히려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홍수로 피해를본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족하지 않은 지원과 미래의 안전도 보장해 줄 수 있는 ‘완전한 복구’다. 거기에 더해 따뜻한 위로와 온정의 손길도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여야 정치인들이 수해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복구작업에 힘을 보탠 일은 환영받을 만하다. 그들이 현장에서 쏟은 마음, 땀이 헛되게 사라지지 않고 정책이나 입법으로 승화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당 지도부가 전남 구례의 수해 현장을 돌며 촬영이 우선인지, 주민 격려가 우선인지 모를 행보를 보이던 와중에 영상 속에서 들렸던 “비 오니까 빨리 돌자”는 말은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참혹한 재해 현장에서조차 멈추지 않고 질척이는 ‘이미지 정치’의 끈질김이라니…. 긴 장마도 그치는 날이 있는데, 이 철 지난 레퍼토리는 언제쯤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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