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크리스토퍼 놀런의 《테넷》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9.05 12:00
  • 호수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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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에 새롭게 접근한 또 하나의 결과물

시작은 20여 년 전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 《메멘토》(2001)를 만들었다. 단 10분간의 일만 기억할 수 있게 된 남자는 자신의 기억과 사투를 벌이며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고자 한다. 이 영화는 ‘리버스(reverse)’ 즉 거꾸로 되감는 이미지들로 문을 연다. 누군가 폴라로이드 사진을 흔들기 시작한다. 선명했던 이미지는 흐릿해지다 검은색으로 변하고, 다시 카메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바닥에 떨어졌던 권총과 총알이 그의 손에 들어온다. 이후 총알은 다시 발사된다.

시간의 역행, 혹은 왜곡. 이는 놀런을 오래도록 사로잡았던 구조다. 물론 《메멘토》의 리버스 장면은 시간을 반복해 되돌린다는 주인공의 상황을 은유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은유가 아니라면? 앞으로 나아가는 속성을 지닌 시간을 실제로 거꾸로 흐르게 한다면? 감독의 신작 《테넷》은 이 같은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테넷》을 보고 ‘내가 지금 뭘 본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이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놀런이라는 필터를 거친 스파이 영화

《테넷》의 스토리 라인은 단순하다.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 ‘인버전’이라는 기술이 있다. 사토르(케네스 브레너)는 미래에서 개발된 이 기술을 우연히 손에 넣고, 시간대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할 작전을 세운다.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는 남편에게 적대적 감정을 품은 사토르의 아내 캣(엘리자베스 데비키), 의문의 협력자 닐(로버트 패틴슨)과 함께 사토르를 막으려 한다.

제목 《테넷》과 영화 속 주요 단어들은 사토르 마방진에서 따왔다. 가로세로 모든 방향으로 읽어도 똑같이 읽히는 단어들의 모음이다. 사토르(SATOR)와 아레포(AREPO)는 인물들의 이름으로 활용되며, 오페라(OPERA)는 영화의 오프닝 장면을 장식하는 식이다. 사토르 마방진의 정중앙 가로세로를 장식하는 단어가 바로 ‘TENET’이다.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발음이 같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활약하는 조직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제목은 순행하고 역행하는 두 개의 타임라인이 동시에 존재하는 영화 속 세계관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복잡한 물리학을 걷어내면 영화의 진짜 장르가 보인다. 《테넷》은 기본적으로 스파이물이다. 놀런이 《007》 시리즈, 특히 로저 무어 주연작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8)의 열렬한 팬임을 떠올릴 때 이는 퍽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말하자면 《테넷》은 놀런이라는 필터를 거친 제임스 본드 영화라 불러도 손색없다. 이국적인 장소들, 주인공의 비밀스러운 정체성, 자동차 추격전, 주력자, 남성용 테일러(tailor)에 대한 농담 등 스파이 영화에 바치는 놀런의 오마주들로 가득하다. 촬영감독인 호이트 반 호이테마가 《007 스카이폴》(2012)에 참여했다는 사실과,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 부근에서 촬영한 추격전 등을 볼 때 영화의 의도는 한층 짙어진다.

차이가 있다면 주인공의 상황이다. 그는 한 번도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엔드크레딧에도 간단히 ‘주도자(The Protagonist)’로 표기된다. 임무가 분명한 기존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테넷》의 주인공은 최소한의 정보만 가지고 움직인다. 영화가 얼마간 진행되면 그가 이중 스파이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모든 조력자들 역시 자신이 접근 가능하거나 쥐고 있는 정보의 양이 전부 다르다. 관객 역시 이 미션의 완성된 그림을 알 수 없다. 상황을 지켜보는 모두가 ‘주도자’가 되어 참여하는 첩보 퍼즐. 《테넷》의 지향점이다.

놀런의 모든 영화는 언제나 장르에 새롭게 접근한 결과물이다. 《다크 나이트》 3부작은 슈퍼히어로 영화와 정치 스릴러의 결합이며, 《인셉션》(2010)은 꿈의 설계라는 장치를 걷어내고 보면 무언가를 훔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즉 하이스트(heist) 장르다. SF 《인터스텔라》(2014)는 뜨거운 인류애에 기반한 멜로에 가깝다. 장르를 활용하는 것에 대한 놀런의 생각은 명확하다. “관객이 이미 장르 관습에 익숙하다는 점은, 내가 설계한 복잡한 아이디어로 그들을 건너오게 만드는 일종의 다리가 된다.”

VFX의 발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스크린으로 불러온다. 그러나 딱 하나, 영화가 섣부르게 뒤흔들 수 없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앞으로 흐른다. 따라서 이 선행 구조의 속성은 종종 도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타임리프, 타임워프, 평행우주 이론, 타임머신 장치 등등의 여러 방식이 여기에 동원됐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 모든 것은 주인공이 특정 시간대로 이동하는 ‘시간여행’의 개념에 가깝다.

영화 《테넷》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왼쪽)과 배우 존 데이비드 워싱턴
영화 《테넷》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왼쪽)과 배우 존 데이비드 워싱턴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시공간의 연금술이 남긴 것

놀런은 언제나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주무른다. 미로 같은 다층의 시공간은 그의 영화를 구성하는 핵심이다. 《메멘토》는 10분씩 시간을 역행하며 진행되고, 《인셉션》은 꿈속의 꿈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서로 다르게 흐르는 시간대에 여러 상황을 중첩시킨 구조다. 《인터스텔라》는 우주의 블랙홀마저 가족의 시간을 탐험하는 주인공의 사랑이 가득한 공간으로 바꿔놓는 시도이며, 《덩케르크》는 육지에서의 일주일과 바다 위의 하루 그리고 공중전이 벌어지는 한 시간이라는 세 개의 프레임을 이음새 없이 엮은 결과물이다.

《테넷》은 이를 뛰어넘어 두 개의 타임라인을 동시에 펼쳐낸다. 세상의 시간이 원래대로 흘러가는 사이, ‘인버전’을 거친 대상의 시간만 거꾸로 흐른다. 인버전의 세계에서는 새가 뒤로 날고, 발사된 총알이 총구로 되돌아오며, 운동에너지를 가진 모든 것이 뒤로 이동한다. 주인공이 3일 뒤로 인버전한다면, 그는 3일간 시간을 거꾸로 이동해 원래의 타임 포인트로 돌아온다. 자동차 추격전에서 반파 상태로 추돌했던 차가 멀쩡해져 역방향으로 달려오는 식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점에서 만나게 하는 시도. 이것이 《테넷》의 실험이다.

영화는 놀런이 과거부터 반복해 온 구조적 탐험의 놀라운 총체다. 이것이 놀라운 경험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어느 순간 이 실험은 극 전체를 압도하는 기술로서만 머무른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해하지 말고 느끼라”는 영화의 당부대로 홀리듯 따라간 뒤엔 물리적 허점들도 떠올리게 된다. 무엇보다 《테넷》에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뜨거운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정의감, 《인셉션》의 절박함, 《덩케르크》와 《인터스텔라》를 충만하게 채워주었던 인류애가 이 영화에선 자취를 감춘다. 놀런의 우주는 깊어지는 대신 확장을 택한 듯 보인다. 그렇다면 《테넷》 이후 놀런의 세계관은 어디를 향할 것인가. 그는 다시 영화 매체 본연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테넷》이라는 ‘인버전 포인트’를 맞이하게 된 것은 아닐까?

전 세계 극장가의 구원투수로 떠오른 《테넷》?

코로나19로 전 세계 박스오피스가 초토화된 상황에서, 《테넷》의 흥행 성적은 북미(9월2일 개봉)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다. 세 차례 연기한 끝에 타 국가부터 순차적으로 개봉을 선택한 《테넷》의 상황을 두고 각종 외신은 “영화관 상영 재개라는 용감한 임무”를 떠맡았다고 일제히 보도 중이다. 국내 박스오피스 상황도 마찬가지다. 블록버스터들의 개봉이 줄줄이 막히거나 연기된 가운데서도 《테넷》은 거의 유일하게 개봉을 강행했다. 국내에서는 8월26일 개봉했지만 전 주말(22~23일) 동안 ‘유료시사회’라는 명목으로 미리 공개됐다. 개봉 일주일 동안 줄곧 1위를 유지했지만 76만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놀런의 기존작들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치다. 월드와이드 수입(9월2일 기준)은 5360만 달러. 제작비 2억 달러를 웃도는 《테넷》의 갈 길이 아직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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