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고래 싸움’ 앞에서 작아지는 프랑스 마크롱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20.09.14 16:00
  • 호수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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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 목소리 못 내고 중국과의 갈등 ‘최소화’에만 급급

지난해 3월26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프랑스를 공식 방문했다. 21일에서 26일까지 이탈리아·모나코·프랑스를 방문하는 미니 유럽 순방길에서 마지막 일정으로 프랑스를 찾은 것이다. 여기서 이례적인 장면이 나왔다. 26일 파리 정상회담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뿐만이 아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장 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까지 동석하는 ‘다자회담’이 이루어진 것이다.

공식 방문 중 양국 정상 간 단독회담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외교상 결례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방문한 시 주석의 입장에서, EU 집행부의 수장과 또 다른 EU의 중심국인 독일 총리를 한자리에서 함께 대면하는 것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자리임이 분명했다. 일각에선 ‘중국의 유럽 끌어안기’라고 보도했지만, 다자회담이 있기 전 시 주석은 줄곧 프랑스 순방이 프랑스와 중국 ‘양국’ 간 우호를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상기한다면, 다자회담 결정은 적어도 중국이 아닌 프랑스의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이 8월28일(현지시간) 파리 엘리제궁을 방문한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환담하고 있다. ⓒXinhua 연합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오른쪽)이 8월28일(현지시간) 파리 엘리제궁을 방문한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환담하고 있다. ⓒXinhua 연합

중국의 ‘기술 유출’에 속수무책인 프랑스

프랑스의 이러한 행보는 미국과 대치국면에 있는 현재의 중국을 대하는 프랑스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뚜렷한 독자적 입장이 부재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챌린지’는 9월1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유럽 순방을 다룬 기사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어째서 분명한 대중(對中)전략을 내놓지 못하는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주중 프랑스 대사를 지낸 장 모리스 리페르 역시 “시 주석이 주도하고 있는 부정적인 사안들은 덮어둔 채, 중국의 긍정적인 부분에만 매료된 기류가 현 정권 수뇌부에 자리 잡고 있다”고 비판했다. 리페르 전 대사가 지난해까지 마크롱 정권 전반기의 주중대사(2017~2019)였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정부로선 더욱 뼈아픈 지적이다.

지금까지 프랑스와 중국, 양국 간의 관계를 가장 긴장시켰던 일은 티베트의 독립 문제 정도였다. 2008년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달라이 라마를 예방한 후 중국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하자, 대통령이 자신의 친서와 함께 프랑스 정가의 대표 중국통인 장 피에르 라파랭 전 총리를 베이징에 급파해 사태를 서둘러 진화한 바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확장정책으로 중국이 국제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프랑스와 중국은 과거보다 훨씬 더 복잡한 관계로 발전했다. 2018년 통계를 보면 프랑스의 대중 수출 규모는 210억 유로, 대중 수입 규모는 500억 유로로 양국 간 무역 불균형은 심각해지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미·중 갈등의 촉매로 작용한 ‘기술 유출’ 문제에도 프랑스가 핵심적으로 관계돼 있다. 과거에는 에어버스를 비롯한 프랑스 항공기술업체들의 본거지인 툴루즈가 기술 유출에 서 중국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면, 이제는 중국이 노리는 타깃의 범위와 무대가 날로 확대되고 있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 기자 출신으로 《프랑스-중국, 위험한 관계》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한 앙투안 이잠바르는 “중국의 산업스파이들이 브르타뉴(Bretagne) 지역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브르타뉴 지역은 프랑스 국방부와 협업 중인 400여 개 방산업체와 다수의 벤처 스타트업은 물론, 엔지니어링 관련 프랑스 최고의 그랑제콜인 ‘국립선진기술학교(ENSTA)’가 위치한 프랑스 방위산업의 메카다.

앙투안 기자는 “(브르타뉴 지역에 위치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대학의 경우, 박사과정생 30명 중 10명이 중국의 하얼빈 기술학교에서 온 학생들”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지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방산업체의 주둔지이니만큼, 군 관계자들이 정착하고 있는 도시에서 군인들과 중국 학생들 사이의 결혼 또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2018년 7월 프랑스 총리실 직속 기구인 국방안보사무국(SGDAN)의 공식 보고서에도 명시된 우려 사항이다.

 

“프랑스는 화웨이 장비를 배제하지 않을 예정”

기술 유출 문제와 함께 프랑스와 중국의 이익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역은 바로 아프리카다. 이미 중국의 대대적인 아프리카 투자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프랑스 역시 자국의 군사를 파병해 결코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곳이 아프리카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부의 한 인사는 프랑스 시사주간지 ‘르 푸앙’을 통해 “아프리카의 치안을 프랑스 군대가 확보해 놓으면, 거기서 중국인들이 사업을 하는 양상”이라고 고백하며 “프랑스가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는 자조 섞인 발언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기술 유출과 아프리카의 주도권 등 프랑스와 중국 간 미묘한 신경전들이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을 향한 프랑스의 ‘분명한 입장’은 이미 지난해 마크롱 대통령이 두 번째 방중을 앞두고 한 차례 밝힌 바 있다. 당시 프랑스 언론은 외교가의 소식통을 인용해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독트린(선언)이 마련되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부로부터 아직 어떠한 해법도 나오지 않고 있다.

9월1일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유럽 순방을 마무리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유럽을 달래고 대미 무역전쟁에서 원군을 얻기 위한 이 여정은 전례 없이 무기력했다. 오히려 왕이 부장은 이탈리아를 비롯해 독일에서까지 홍콩과 위구르족 등 중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 집중포화를 받아야 했다.

프랑스 역시 중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 틈바구니에서 기꺼이 고래 싸움에 새우가 되려 하기보다, 그저 제3자로서 관망만 하고 있는 모습이다. 미·중 갈등의 상징인 중국 ‘화웨이’ 문제에 대해서도 마크롱은 8월28일 왕이 외교부장과의 회담에서 “프랑스는 화웨이 장비를 배제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최소한의 입장만을 밝혔다.

최근 서방 선진 20개국 회담에 이란 외무부 장관을 깜짝 초청하고, 폭발사고로 쑥대밭이 된 베이루트 현장에 달려가 레바논 시민들을 위로하는 화려한 외교술을 선보이고 있다. 국내 사안에서도 시위대에 맞서 논쟁을 주저하지 않는 그가 유독 한 가지 미·중 문제에서만큼은 미적지근한 모습을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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