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뮬란》, 디즈니 영화에서 중국 무협영화의 향기만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9.19 15:00
  • 호수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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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뮬란》을 둘러싼 잡음들

옛날 옛적, 중국 남북조시대에 화목란(花木蘭)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목란은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을 하고 전쟁터에 나가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 공로로 높은 작위를 받지만 이를 버리고 가족 곁으로 돌아와 헌신한다. 중국인들은 그런 목란을 ‘충’과 ‘효’의 상징으로 여겼다. 중국 고대 민간 서사시 ‘목란사(木蘭辭)’를 통해 구전되던 목란 이야기를 전 세계에 알린 건 디즈니다. 목란 설화를 모티브로 제작한 1998년 애니메이션 《뮬란》을 통해서 말이다.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3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디즈니 최초의 아시아 여전사’라는 기록도 남겼다. 돌이켜보면 기이한 일이다. 중국 구전 설화의 주인공이 디즈니 프린세스가 되다니. 디즈니의 행보를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뿌듯했을까. 뭔가를 빼앗긴 기분이 들었을까. 더 이상 자신들의 이야기가 무방비로 할리우드화되는 걸 원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디즈니가 22년 만에 다시 호출한 《뮬란》 실사 영화가 이를 증명한다.

《뮬란》의 실사화 계획이 발표된 건 2015년이다. 발표와 함께 우려와 기대가 동시에 쏟아졌다. 조금 더 우세한 건 우려 쪽이었다. ‘화이트워싱(아시아인 캐릭터를 백인으로 바꾸는 것) 된 뮬란을 원치 않는다’는 온라인 청원 글이 11만 명의 서명을 돌파한 이유다. 다양한 인종 끌어안기 행보를 보이고 있던 디즈니는 이를 빠르게 수용했다. 유역비가 뮬란에 최종 캐스팅되면서 화이트워싱에 대한 우려는 꼬리를 내렸다. 디즈니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견자단, 이연걸, 공리 등 중국계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했다. 화이트워싱 탈피를 위한 선택? 맞다. 그리고 또 하나. 여기엔 황금알을 낳는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한 디즈니의 원대한 꿈이 숨어 있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사면초가에 빠진 디즈니

《뮬란》의 실사화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 중국과 미국 합작으로 《뮬란: 전사의 귀환》이 관객을 만난 바 있다. 당시 뮬란에 캐스팅된 조미와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후보 중엔 유역비도 있었다. 인생 새옹지마랄까. 《뮬란: 전사의 귀환》에 캐스팅되지 못한 덕분에 유역비는 10년 후 디즈니 실사판의 여전사가 되는 기회를 얻었으니. 그러나 이것은 머지않아 일어날 논란의 서막이었으니, 잘나가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유역비 자신이었다.

홍콩 민주화운동이 거세던 지난해 8월 유역비는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다. “홍콩 경찰을 지지한다. 홍콩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 당시 홍콩 거리에서는 경찰이 쏜 빈백건에 맞은 시민이 실명 위기에 처하는 등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인한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차별과 탄압에 맞서는 뮬란을 연기하는 배우의 경찰 옹호 발언은 파장이 거셌다. 유역비를 향해 싸늘한 시선이 쏟아졌다. 그의 발언은 ‘보이콧뮬란(#BoycottMulan)’ 운동을 촉발시켰다. 말했잖은가.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디즈니의 상황은 첩첩산중, 사면초가다. 유역비가 쏘아올린 보이콧 논란이 잦아드나 했더니, 코로나19로 인한 개봉 연기 상황을 맞았고, 결국 극장 대신 온라인 서비스(OTT) ‘디즈니 플러스’를 통한 미국 공개를 결정했으나, 공개되자마자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엔딩크레딧에서 신장위구르 자치구 내 공안국에 감사를 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신장위구르 자치구는 중국 정부가 위구르족을 강제로 구금하고 인권을 탄압한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다. 디즈니가 중국 공안의 반인권 행태를 옹호했다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뮬란 보이콧’ 운동에 다시 기름을 부었다. 마침 최근 중국과 날 선 기류를 형성하고 있는 미국 정치권까지 디즈니의 친중국 행보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나섰다. 바람 잘 날 없는 《뮬란》이다.

작품 외적인 스캔들을 이겨낼 수 있는 건 결국 작품의 완성도와 재미.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의 《뮬란》은 어떨까. 원작과 큰 틀은 비슷하지만, 적지 않은 변화를 꾀했다. 가장 큰 변화는 뮤지컬 요소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주제곡 《Reflection》을 부르는 뮬란을 만날 수 없다. 다만 뮬란이 각성하는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배경에 깔릴 뿐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뮬란과 러브 라인을 형성했던 리샹 캐릭터는 뮬란의 스승인 텅 장군(견자단)과 군대 동료인 홍휘(요손 안) 두 캐릭터로 분리됐다. 유머가 바짝 탈색된 것도 큰 변화다. 이는 원작에서 뮬란의 조력자이자 신스틸러로 활약한 수다쟁이 용 캐릭터 ‘무슈’의 삭제와 밀접하게 관련 있다. 중국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동물인 용의 희화화를 중국 측이 달가워하지 않아 무슈를 뺐다는 이야기도 들리는데, 무슈가 빠진 자리를 채운 건 우아한 자태의 봉황이다.

 

원작의 장점을 버리고 남은 건 뉘앙스?

뮬란 자체 캐릭터도 변했다. 애니메이션 뮬란은 훈련을 통해 여전사로 성장했다. 반면에 유역비의 뮬란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힘을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 한마디로 방점은 ‘성장’이 아닌 ‘각성’이다. 비범함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이를 감추고 살아야 했던 뮬란이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과정에 영화는 전력을 다한다. 이를 위해 새롭게 등장시킨 인물이 공리가 연기한 마녀 시아니앙이다. 특별한 능력을 갖췄지만 마녀라는 이유로 배척당했던 시아니앙. 뮬란과 시아니앙은 거울과도 같다. 악당 보리칸이 뮬란을 가리켜 “A Girl?(계집아이?)”이라고 하자, 시아니앙이 “A woman!(여자입니다!)”이라고 수정하는 모습은 이 영화가 말하고 싶어 하는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문제는 사건의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시아니앙의 감정 변화가 너무 뜬금없고 허술하게 다뤄지고 있어 맥을 빠지게 한다는 점이다. 뮬란의 멘토 역할을 하는 텅 장군의 심리 역시 인과관계 없이 던져지기만 해서 매력도가 떨어진다. 리샹 캐릭터를 두 인물로 분리하는 대수술을 거쳤지만, 정작 새로 탄생한 인물들이 별다른 매력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영화가 심심해진 면이 있다. 그래서, 원작의 매력이었던 뮤지컬 요소 빼고 무슈 빼고 리샹도 빼고 나니 뭐가 남았냐고? 아쉽게도 중국 무협영화 뉘앙스만 남았다. 작품 외적인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우리가 디즈니에 원한 게 이런 건 아니지 않았나.

할리우드의 ‘탈(脫)화이트워싱’

티베트인 역할에 틸다 스윈튼을 캐스팅한 《닥터 스트레인지》, 일본 쿠사나기 소령 역할을 스칼렛 요한슨이 맡은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등 화이트워싱은 할리우드에서 만나기 쉬운 캐스팅 논란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한 항의로 2016년 소셜미디어에서는 ‘존 조 놀이’(#StarringJohnCho·할리우드 영화 포스터에 존 조의 얼굴을 합성해 공유하는 문화 현상)가 유행하기도 했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최근 할리우드에는 ‘탈(脫)화이트워싱’ 움직임이 활발하다. 백인이 주인공을 차지하던 관례를 깨고 아시안이나 흑인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인도 혈통인 나오미 스콧이 실사판 《알라딘》의 자스민에 캐스팅된 것도 이러한 흐름의 하나였다. 화이트워싱을 잘 피해 간 《뮬란》은 도리어 중국 눈치를 너무 봐서 아쉬움을 남긴 사례로 기록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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