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품이라도 팔아야” 감염병에 굴복한 ‘왕립’의 눈물
  • 방승민 영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0.26 15:00
  • 호수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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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한 사상 초유의 불황에 왕립아카데미도 허리띠 졸라매기

영국 런던 시내 중심에 위치한 왕립아카데미는 전 세계적으로 높은 명성과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미술 교육기관이자 수준 높은 컬렉션을 보유한 미술관이다. 왕립아카데미는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자선단체로, 전시와 전시회 작품 판매, 기부, 회원권 판매 등의 수익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왕립아카데미의 올해 수익이 평년 대비 75%나 감소하면서 현재 전례 없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왕립아카데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총 인력의 40%에 해당하는 150명가량의 직원 정리해고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내 연례 학술위원 회의 자리에서 하나의 제안이 던져졌다.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판매해 그 수익금으로 직원들의 고용을 유지하고 재정 문제를 해결하자는 의견이었다. 이는 곧장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언급된 미켈란젤로 작품은 16세기 초 제작된 대리석 조각품 ‘타데이 톤도’로, 1829년 조지 보몬트 경이 왕립아카데미에 기부한 이후 줄곧 아카데미가 소장해 왔다. 타데이 톤도는 영국이 소장하고 있는 유일의 미켈란젤로 대리석 조각품이기도 하다. 작품의 가격은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아트 뉴스 페이퍼에 따르면 수억 파운드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된다. 이는 우리 돈 수천억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왕립아카데미의 올해 수익이 평년 대비 75%나 하락하면서 현재 전례 없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Xinhua 연합
코로나19 사태로 왕립아카데미의 올해 수익이 평년 대비 75%나 하락하면서 현재 전례 없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Xinhua 연합

봉쇄령과 거리 두기 따라 문 닫는 문화기관들

왕립아카데미는 1962년에도 한 차례 소장품 판매를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왕립아카데미는 ‘벌링턴 하우스 카툰(The Burlington House Cartoon)’으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목탄화를 판매하려 했으나, 사회적 논란에 부딪혔다. 결국 왕립아카데미는 판매가 아닌 모금활동을 통해 위기를 넘겼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의 수석 예술비평가 알라스테어 수크는 이번에 왕립아카데미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판매하더라도 결국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재정 위기가 닥칠 때마다 주요 소장품을 포기하려는 것은 아카데미의 명성을 실추시킬 뿐이라고 비판했다. 논란이 지속되자 결국 왕립아카데미는 공식 성명을 통해 미켈란젤로 작품 판매는 아카데미 소속 학술위원 일부의 의견에 불과하며 왕립아카데미가 소장품들을 판매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영국 내 다수의 미술관·박물관·공연장은 전시 및 공연 수익, 회원권 판매, 기부금 등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코로나로 인한 봉쇄령과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이러한 문화기관들의 수입이 크게 감소해 재정난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관 중 하나인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은 2018년 방문객 수가 590만 명에 달했으나, 올해는 평년의 25~30%도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브리스톨에 위치한 음악 공연장 ‘더 익스체인지’도 평소 수용 가능 인원이 250명이지만 거리 두기 안전지침에 따라 현재는 최대 22명만 입장 가능해 공연 수익 악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결국 급격하게 감소한 수익과 비용 절감을 위해 테이트 미술관은 상업 부문 직원 300명의 정리해고를 발표했다. 템스 강변에 위치한 복합문화시설 ‘사우스뱅크’도 400여 명의 직원을 해고해야 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도 총 직원의 10%에 해당하는 103명을 정리해고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뮤지컬 《위키드》와 《라이언킹》으로 유명한 ‘앰배서더 시어터 그룹’은 지난 8월말까지 1200명을 해고한 데 이어 500명을 추가로 정리할 예정이다.

왕립오페라하우스 역시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한 기부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영국 정부의 긴급 구제자금도 신청해 놓았지만 소장품 판매와 정리해고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특히 왕립오페라하우스는 소장품인 데이비드 호크니의 ‘데이비드 웹스터 경 초상화’를 옥션을 통해 판매하기로 결정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1800만 파운드(약 265억원)의 가치를 지닌 이 작품 판매를 통해 필수 기금을 마련하고 국제 오페라와 왕립발레단의 둥지 역할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왕립오페라하우스의 최고경영자 알렉스 비어드는 영국 일간지 옵서버와의 인터뷰를 통해 작품 판매 결정은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고 전했다.

왕립아카데미가 소장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타데이 톤도’ ⓒEPA 연합
왕립아카데미가 소장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타데이 톤도’ ⓒEPA 연합

정부, 문화예술계 심폐소생 나섰지만…

매년 문화예술 산업이 영국 경제에 기여하는 바는 100억 파운드(약 14조7000억원) 이상이다. 이는 결코 규모가 작은 편이 아니다. 내국인 관람객뿐 아니라 해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역할 또한 톡톡히 해 왔다. 특히 영국의 대표적 관광지 중 한 곳인 ‘대영박물관’의 경우 지난해 총 방문객 수는 620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 중 465만 명이 외국인 관광객이다.

영국 정부 문화담당 부서인 디지털문화미디어체육부는 지난 7월, 15억7000만 파운드(약 2조3000억원)의 긴급 문화지원 기금을 편성해 코로나19로 재정난에 처한 문화기관들을 구제할 방침을 발표했다. 기금 지급을 통해 10월부터 내년 3월까지 기관들이 활동을 재개하고 운영을 정상화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지원 대상은 영국 정부 소속 문화기관부터 미술관·박물관, 예술활동을 하는 프리랜서, 대규모 나이트클럽까지 광범위하다.

이 기금 중 절반에 해당하는 8억8000만 파운드는 기관들의 신청을 받아 심사 후 지원금 형태로 지급하게 된다. 100만 파운드 미만의 지원금 신청 기관들에 대한 심사는 이미 종료돼 지난 10월5일과 16일 지원금 수령 기관 리스트가 발표됐다. 현재까지 영국 내 2000여 기관이 약 3억3000만 파운드(약 4900억원) 규모의 지원을 받았다. 이후 100만 파운드 이상의 지원금을 신청한 기관들에 대한 지원 심사 결과 또한 발표될 예정이다.

기관의 주요 방문객인 해외 관광객의 유입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고, 여전히 만 명 단위의 하루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어 이번 지원 역시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코로나19의 끝이 언제가 될지 요원한 상황에서 기관들의 대규모 직원 정리해고와 소장품 판매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럼에도 여러 문화예술기관들은 정부의 이번 지원금이 막막했던 재정난 상황에 한줄기 단비와 같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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