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외교적 중립’인가…베를린 소녀상 설치 논란 지속
  • 이수민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1.04 15:00
  • 호수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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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내 위안부 문제 성찰하는 흐름 확산

지난 9월28일은 베를린 미테구에서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열린 날이다. 미테(Mitte)는 독일어로 ‘중심’이라는 뜻으로, 미테구는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위치할 뿐 아니라 독일에서는 최초로 공공장소에 설치된 소녀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의미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소녀상이 세워지기까지의 노력은 ‘코리아협의회(Korea Verband)’에서 도맡았다. 코리아협의회는 1990년 발족한 시민단체로 베를린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공론화하는 사업을 비롯해 북한·이주민 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세미나·회의·심포지엄 등을 개최해 한국을 알리고 문화 교류를 활성화하려는 노력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문제는 제막식 바로 다음 날 발생했다. 일본 관방장관인 가토 가쓰노부가 소녀상 설치에 유감을 표명하며 소녀상 철거에 앞장설 것을 선포한 것이다. 이틀 후에는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이 독일 외무부 장관 하이코 마스에게 전화를 걸어 소녀상 철거를 요청했다. 독일 좌파언론 ‘타츠(taz)’는 당시 독일 외무부에 연락을 했지만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고 뒤늦게야 일본 대사관이 조용히, 하지만 발 빠르게 베를린 상원에 연락을 취했던 사실을 알아냈다.

10월23일(현지시간)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시민단체 ‘오마스 게겐 레히츠’ 회원들이 ‘평화의 소녀상’ 철거 명령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10월23일(현지시간)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시민단체 ‘오마스 게겐 레히츠’ 회원들이 ‘평화의 소녀상’ 철거 명령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의 질긴 ‘소녀상 철거’ 압박의 역사

이러한 일본의 압박에 독일의 반응은 ‘놀랍게도’ 무기력했다. 베를린 상원은 10월13일 독일 일간지 ‘타게스슈피겔(Der Tagesspiegel)’에 소녀상 철거에 대해 자신들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밝히며, 일본 대사관과 미테구청의 소통을 통해 재빠른 해결책을 강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재 밝혀진 바에 따르면, 베를린 상원은 10월12일 미테구청장 슈테판 폰 다셀에게 소녀상 철거 결정을 환영한다는 감사의 말이 포함된 서한을 보냈다. 즉 이들에게는 철거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입장에서는 베를린이 도쿄와 자매결연을 했으며, 특히 미테구는 도쿄도의 신주쿠와 짝을 지었다는 점이 하나의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된다. 이러한 도시 자매결연을 통해, 국제적으로 ‘열린 대도시’라는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앞서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소녀상을 철거하지 않자 오사카와의 자매결연이 취소된 이력이 있기에 베를린이 이를 두려워한 것이란 지적도 있다.

소녀상 문제는 비단 베를린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지난해 여름 시사저널이 보도했던 대로 ‘독일-오스트리아 여성예술가총연맹(GEDOK)’ 역시 전시회에 소녀상을 포함했다는 이유로 일본 대사관의 항의를 받았다. 2016년에는 수원시가 프라이부르크와 자매결연을 한 것을 기념하고자 소녀상을 선물로 보내겠다고 제안했고, 처음에는 승낙했다가 설치를 취소한 전례도 있다. 당시 프라이부르크 시장이었던 디터 살로몬은 이에 대해 “처음 수원시에서 소녀상을 선물로 보내주겠다고 했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흔쾌히 수락했지만, 그것이 한·일 문제의 중심에 놓인 ‘문제적’ 작품인지는 몰라 뒤늦게 취소했다”고 밝혔다.

결국 이 소녀상은 2017년 3월부터 바이에른주 레겐스부르크에 위치한 개인 공원에 전시돼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일본 측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표지석은 제거될 수밖에 없었다.

다각도로 이뤄진 일본의 압력에 밀려 미테구청은 10월8일 보도자료를 통해 소녀상을 10월14일까지 철거하라고 요청했다. 코리아협의회가 소녀상 설치를 신청할 당시 불분명한 정보를 기재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평화의 소녀상이 반일감정을 유도하고 일본에 대한 한국의 일방적인 입장만을 드러낸다는 점, 그리고 표지석에 실린 내용을 사전에 통지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철거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코리아협의회는 신청 당시 13페이지에 걸쳐 소녀상의 의미와 역사적 맥락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때문에 미테구청의 철거 통보는 이들에게 황당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정에 코리아협의회는 곧바로 철거 명령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했고, 철거는 베를린 행정법원이 검토를 마칠 때까지 보류됐다. 여기에 사민당·녹색당·좌파당 등 정치권에서도 코리아협의회 편에 서서 힘을 더하고 있다. 사민당과 녹색당은 전범이라는 차원에서 성폭력 개념을 적용해 좀 더 광범위하게 문제 제기의 타당성을 옹호했다. 좌파당은 이러한 논점에 더해 일본의 우익보수 정권에 독일이 무기력하게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을 꼬집어 비판했다.

 

독일 정치권 “독일, 일본 우익 정권에 휘둘려”

정치권이 미테구청의 철거 결정에 강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독일의 전범 전력 때문이다. 독일은 전범국임에도 과거 청산 및 희생자에 대한 사과를 분명히 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 독일은 일본이 귀감으로 삼았으면 하는 국가다. 그런데 과거 독일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소녀상 설치 시도가 실패했다는 전력을 보면, 독일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 양국의 문제로 치부해 ‘외교적 중립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독일 내부에서도 무엇이 진정한 ‘중립’인지 다시 고민해 봐야 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한 가지 긍정적인 면은 있다. 과거 일부 동아시아 관련 학자들만 관심을 보였던 주제가 이제 좀 더 대중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트위터를 비롯한 SNS에서도 이번 사태와 관련해 다양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일본이 주장하는 것처럼 위안부 문제는 다 해결되었으며 한국 측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국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 문제의 중요성을 꼬집는 의견들도 적잖이 보인다.

사건 경과에 치중하기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고민과 성찰을 하는 보도도 이번 기회에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위스와 독일 학자들이 운영하는 사이트 ‘현대사’에서는 위안부의 역사나 논란에 대해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차원에서 정리하는 글을 공개하기도 했다. 독일에선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등과 같은 논의가 현재까지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 피해자들을 대할 때 제3자로서 한 발짝 물러나 방관자적 자세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와 성폭력 근절이라는 목표를 갖고 국제적 리더로 나아갈 것인가. 독일 내 소녀상 설치 논란은 더 거시적인 논쟁으로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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