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민주화 시위대가 독일대사관을 향한 까닭
  • 클레어함 유럽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1.05 10:00
  • 호수 16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국 국민들 코로나19로 신음하는데, 국왕은 독일서 호화생활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논란을 부르고 있다. 2007년부터 독일에 거주해 온 것으로 알려진 태국 국왕 라마 10세(68)의 거취가 태국과 독일의 외교 문제로 비화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태국에서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확산세를 보이는 가운데, 지난 10월26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방콕 주재 독일대사관으로 향했다. 이들은 쁘라윳 짠오차 총리의 퇴진과 함께 국왕의 권력 축소 등 왕실 개혁도 함께 외치고 있다. 2016년 즉위 이전부터 독일에서 거주해 온 라마 10세에 대해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태국 국민들은 독일 정부에 왕의 입국 및 체류 불허, 공식 조사 등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카나 랏싸던 인터내셔널(Khana Ratsadon Intl)’이라는 단체가 대사관에 전달한 공식 서한에 따르면 “왕실이 헌법 아래 기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 시위대의 가장 중요하고 용기 있는 요구 중 하나”라며 “이들은 엄혹한 형법 112조에 의해 왕실의 탄압을 받을 수 있는데도 용기를 냈다”고 전했다. 또한 “왕은 독일에서 태국 국정을 수행해 왔으며, (2016년 이래 9명의 태국) 야권 인사들의 실종을 명령했다”며 “이는 국제관습법과 독일헌법 1조를 위반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온라인 청원은 현재까지 약 21만 건을 넘어섰고 독일 의회에도 제출되었다.

ⓒEPA 연합Pixelhelper.org 제공
태국의 민주화운동 시위대가 10월21일(현지시간) 밤 수도 방콕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면서 독재에 저항하는 의미의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있다. ⓒEPA 연합

“독일, 태국 국왕에 조치 취할 용기 없을 것”

이에 하이코 마스 독일 외교부 장관은 같은 날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다수의 독일 언론은 ‘마스 장관이 태국 국왕의 독일 체류에 대해 협박했다’는 헤드라인을 선택했다. 마스 장관은 “물론 나도 국왕의 행적을 계속 주시해 오고 있다”며 “독일 체류 중 불법행위가 발견된다면 즉각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이미 10월초 연방하원에서 라마 10세의 독일 내 국정수행에 대해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힌 바 있다. 마스 장관은 “우리는 외국 인사가 독일에서 자국의 국정을 수행하는 것에 항상 반대할 것”이라며 “태국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국정운영은 독일에서 이뤄질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현지에선 독일 외교부의 공식 입장에 대해 엇갈린 반응이 나온다. 포츠담대학의 역사학 겸임교수이자 함부르크대 동남아학부 교수인 스벤 트라쿨훈 박사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독일과 태국은 19세기 이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며 “현대사에서 외국 국왕이 독일 영토에서 통치한 선례가 없기에 독일 정부가 합법성 여부를 두고 국왕의 문제를 검토하겠다고 선언하는 것 외에 딱히 다른 방법이 없으리라 본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베를린에 기반을 둔 인권단체 ‘픽셀헬퍼(pixelhelper)재단’은 이런 독일 정부의 입장에 회의적이다. 이 단체는 지난 5월, 일주일간 라마 10세가 체류했던 호텔 앞면에 ‘태국 국민들을 더 이상 고문하지 말라!’를 비롯해 비슷한 구호를 빛으로 투영하는 항의시위를 벌여 주목을 받았다. 픽셀헬퍼재단을 설립한 올리버 비엔코프스키 대표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외교부는 태국 국왕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용기가 없을 것”이라고 운을 뗀 후, “잔인한 국왕이 독일에 머무르면서 납치와 살인을 명령했는데도 독일 정부는 그를 국외로 추방하거나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상 기피인물)’로 입국금지 조치를 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엄청난 금액의 세금 감면 혜택까지 제공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특히 태국 군사정권과 중국의 동맹관계를 고려하면, 대중국 외교관계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요시하는 독일 정부로부터 적극적인 조치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한 “태국 왕이 독일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그의 호텔 앞에서 365일 매일 항의시위를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단체는 리오 라이저의 히트곡 멜로디를 딴 《라마 10세, 독일의 왕》이라는 풍자적 노래를 동영상으로도 제작했는데, 이는 태국의 소셜미디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EPA 연합Pixelhelper.org 제공
독일 인권단체 픽셀헬퍼재단은 지난 5월 라마 10세가 체류했던 호텔에 ‘태국 국민들을 더 이상 고문하지 말라!’등의 구호를 빛으로 투영하는 항의시위를 했다. ⓒPixelhelper.org 제공

獨 녹색당, 태국 국왕의 탈세에 항의 

현지 언론 보도에 의하면, 라마 10세는 지난 3월말부터 첩 20명가량을 포함한 100여 명의 수행단과 함께 바이에른 알프스 산지의 휴양도시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고급 호텔에 묵었다. 투칭의 슈타른베르크 호숫가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탈세를 위해 호텔에 숙박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또한 녹색당 의원들은 외교관이 아닌 현 국왕이 라마 9세 사후, 독일에서 상속세를 내지 않은 사실에 항의하기도 했다. 7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암투병을 하는 미국의 큰아들에게 재정지원을 전혀 하지 않는다든지, 취리히공항에서 사진기자를 체포하게 하거나, 초미니 탱크톱 차림으로 외출하는 등 여러 기행으로 그간 독일의 ‘빌드(Bild)’를 비롯한 타블로이드 매체의 인기 소재가 되어 왔다. 

다수의 독일 언론은 “68세의 태국 왕이 독일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특히 국가의 수장으로서 코로나19 바이러스 발생 후 침체된 관광사업으로 인해 힘겨워하는 자국민을 격려하지 않고 바이에른주에서 사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태국 PBS방송의 보도에 의하면, 코로나19 발생 후 올 상반기 생활고 등으로 태국 내 자살률이 22% 증가했다. 태국의 정치학자 잔지라 솜바트푼시리는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올해 말까지 태국 인구 6900만 명 중 약 1400만 명이 실업자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이 와중에 태국 정부의 부정부패 스캔들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어 국민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고 지적했다.  

반면 350억 유로(약 46조6550억원)에 육박하는 라마 10세의 추정 자산은 현존하는 세계 왕족 중 최고액에 해당한다. 아버지 사망 후 권력을 확장시켜온 그는 2017년 태국 왕실의 재정을 자신이 임의로 관리할 수 있도록 관련 법을 개정했는데, 이로 인해 70년 만에 다시 국왕이 직접 재정을 장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유력한 독일 매체 ‘타게샤우’는 태국 국왕의 첩과 전 부인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뿐만 아니라 독약 중독, 차 사고, 지붕 낙상 사고 등 과거 측근 인사들의 괴이한 사고들이 루머를 야기한다고 보도하면서, 군인 출신 현직 총리의 비민주적인 정부와 비이성적인 국왕의 협력이 태국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평가했다. 뮌헨에 기반을 둔 매체 ‘머쿠어(Merkur)’도 ‘엄청난 규모의 호화사치: 태국 국왕은 해외에서 바이에른주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태국은 큰 위기에 처해 있고 국민들은 점점 빈곤해지는 반면, 국왕 소유의 비행기만 15억 유로”라고 지적하며 “수많은 인파가 태국의 거리에서 왕의 ‘모국’을 바이에른 북부로 묘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바이에른주가 더러운 단어가 되어 가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