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이건희]‘재벌 해체론’으론 문제 해결 못 한다
  • 이한상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1.02 14:00
  • 호수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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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뛰는 놈 위의 나는 재벌” 빈축…이사의 법적 책임 강화해야

한국 경제의 빠른 질적·양적 성장에는 재벌기업의 공이 크다. 국가 주도 경제 발전 시기에 정부는 재벌을 하위 파트너로 삼아 전략적 산업정책을 폈다. 부족한 자금은 실질적 마이너스 금리로 우선 배정해 성장시켰다. 실패가 발생하면 이 부분을 성공한 재벌에게 인수시켜 국가적 위험관리를 해 왔다. 

시장이 아닌 국가의 프로젝트 관리는 과잉투자와 중복투자로 몇 차례의 국가적 경제위기를 불렀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국제금융 세력은 자본이득을 위해 더 이상 이들 재벌과 국가의 명시적 파트너십을 용인하지 않았다. 이후 세계적 분업 질서와 국제금융시장에 잘 적응한 일부 재벌은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자본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영미식 기업지배구조가 모범규준이 되면서 재벌의 소유 및 지배구조와 커다란 불협화음을 잉태했다. 주주 중심의 소액주주운동이 일어났다. 다단계, 순환, 교차 출자를 이용한 소수지배구조(controlling-minority structure)를 핵심으로 하는 한국형 재벌 지배구조는 내외부 견제장치의 무력화, 경제력 집중, 부당한 내부거래를 통한 재벌 가문의 사익편취를 방조한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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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타도 대상 아니다 

경제권력을 넘어선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는 한국형 경영권, 경영권의 가족 내 승계는 외환위기 전 국가가 눈감아준 전근대적 특권이었다. 새로운 경제 질서로 제시된 영미식 자본주의가 인정하지 않는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재벌들은 내부자 거래와 특수 자본거래를 시도해 소수주주의 이익을 침해했다. 이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거세지면 정부는 뒤늦게 상법, 공정거래법, 세법을 손질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재벌은 형사적 처벌을 감수하는 동시에 또 다른 법적 회피 수단을 개발하며 특수이익을 지켜왔다. 양극화와 불평등이 문제가 되는 21세기 대한민국은 재벌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재벌그룹은 타도 대상인가. 재벌그룹의 해체가 한국 경제의 문제 상당 부분을 해소할 수 있는가. 기존의 재벌 개혁론자들 중 상당수는 재벌 개혁 만병통치론자들이다. 잘못된 진단이다. 과거 아시아의 용이었던 국가의 경제계 인사들은 재벌경제를 통해 세계적인 규모의 제국적 기업을 확보한 한국을 부러워한다. 재벌은 타도나 해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국가경제를 위해 잘 활용해야 하는 전략적 자산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주요한 경제 문제는 재벌의 기업지배구조 외에도 공공부문의 과도한 개입과 비효율, 이중 노동시장, 비효율적인 비대한 자영업군, 사회안전망과 복지국가 건설 등으로 복잡다단하다. 재벌 문제의 개혁만으로 해결될 문제들이 아니다. 

재벌구조를 이렇게 두자는 것은 분명 아니다. 국가와 특정 기업이 비정상적 밀월관계를 통해 성장하던 과거에는 주요 자금 조달 수단이 국가의 신용 배분이었다. 정권만 용인해주면 기업지배구조의 문제는 큰 이슈가 아니었다. 그러나 국제적 금융 질서에 편입되고 자본시장에서 투자자와 국민의 자금을 조달하는 순간 더 이상 특권은 용납될 수 없다. 한국적 지배소유구조가 다수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사익 추구 및 이에 따른 주주 간 부의 이전이라는 문제를 낳는 한 기업의 사회적 정당성은 크게 훼손된다. 실패한 재벌 경영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기업의 성과가 주주에게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적 정의가 작동하지 않는 경제다.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의 재벌 정책은 효과적이지 않았다. 재벌 정책은 정부-재벌 파트너십의 연장선상에서 진화했다. 즉, 재벌 정책은 재벌구조 그 자체를 인정하는 바탕에서 마련된 정책들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공공연히 ‘총수’라는 표현을 쓴다. 세법은 경영권 프리미엄이라는 해괴한 개념을 인정하고 이를 상속세 할증 요인으로 만들었다. 시장 경쟁을 담보하는 것이 주 임무여야 할 공정위는 재벌대책부처럼 행동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퇴임한 공직자를 재벌그룹에 취업시키며 재벌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구축했다. 국세청과 검찰도 예외는 아니다. 재벌 자체를 인정하고 재벌이 벌이는 잘못된 행위를 규제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상장회사의 기업지배구조를 달성할 수 없다. 사후약방문으로 공정거래법, 상법, 세법을 열심히 고쳤지만 ‘뛰는 놈 위의 나는 재벌’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정부-재벌 ‘적대적 공생’ 청산부터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재벌의 행위 규제는 비효율적이다. 그들은 새로운 방식을 찾아낼 것이고, 문제가 되면 막강한 법률자원을 통해 법원에서 사안의 특수성을 이유로 스스로를 구제할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오히려 원론적인 접근이다. 예를 들면 이번 공정경제 3법은 재벌의 개별 행위를 규제하지만, 법이 통과돼도 기업들의 지배구조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차라리 천준범 변호사 제안대로 상법의 원리 조항인 ‘이사진은 회사를 위해 일한다’를 ‘이사진은 모든 주주를 위해 일해야 한다’로 고치고, 이사의 법적 책임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정공법을 써야 한다. 

원론적인 방식이 최선이다. 이사회가 모든 주주를 위해 일하고 법 위반에 대해 민사적 소송이 가능하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장 지주회사의 지배 가문 보유비율은 희석된다. 원칙이 작동하면 승계를 위한 불법과 탈법, 이를 막기 위한 행위 규제와 형사적 조치와 같은 사회적 소모전을 피할 수 있다. 지배 가문의 후계자들은 영미 자본주의 국가처럼 직접적 경영 참여보다는 대주주로서 이사회에 참여해 견제 및 자문을 하게 될 것이다. 국민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가들이 환경, 노동, 사회적 책임과 지배구조를 포함한 장기적 관점을 지지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  

요약하자면 현재의 재벌 지배구조와 규제는 20세기 한국 경제 발전 과정의 특수한 산물이며 개혁은 정부와 재벌 간 적대적 공생관계 청산에서 시작돼야 한다. 해답은 이사회의 모든 주주에 대한 책임 강화와 위반 시 민사적 구제의 강화다. 기업지배구조가 개선돼야 자본시장을 통해 경제의 요소 생산성이 커질 것이다. 동시에 기업에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 이중 노동시장 문제의 해결, 공공부문 개혁, 그리고 사회안전망과 복지제도 개선이라는 대타협을 시작할 수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상속세율도 이러한 대화의 전제가 갖춰져야 논의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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