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칼부림’…임계치 넘어선 코로나 블루, ‘코로나 레드’로
  • 김용호 캐나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1.07 15:00
  • 호수 16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핼러윈 밤 무차별 ‘피의 살육’에 캐나다 사회 발칵…주정부 “코로나19로 정신건강 문제 심각”

캐나다 퀘벡시티는 한국인들에게 드라마 《도깨비》로 유명해졌다. 북미의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을 따라 유럽풍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배우 공유가 거닐었던 퀘벡시티 거리는 코로나19 확산 전까지 한국인 여행자들로 사계절 북적였다. 프랑스 이민자 후손들이 세운 도시로, 오래된 성당과 고풍스러운 호텔 등이 어우러진 퀘벡시티가 2017년 1월 6명이 숨진 모스크 총기난사 이후 3년여 만에 또다시 피로 얼룩졌다. 핼러윈 밤, 공포영화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실제로 터진 것이다. 20대 남성이 흉기를 휘둘러 2명이 숨지고, 5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번 사건은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꾸준히 제기되던 캐나다 사회의 정신건강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11월1일 새벽 캐나다 퀘벡의 명소인 샤토 프롱트낙 호텔 인근 도로를 경찰이 봉쇄하고 있다. ⓒAP 연합
11월1일 새벽 캐나다 퀘벡의 명소인 샤토 프롱트낙 호텔 인근 도로를 경찰이 봉쇄하고 있다. ⓒAP 연합

정신상담 요청 시민, 퀘벡주만 1만6000명

10월31일 오후, 퀘벡시티에서 남서쪽으로 약 270km 떨어진 상 드티레라는 작은 도시에 사는 칼 지라드(24)는 검은색 새턴(Saturn) 승용차를 몰고 퀘벡으로 향했다. 밤 10시쯤 관광지가 밀집한 올드퀘벡의 중심지 샤토 프롱트낙 호텔 근처에 도착해 차를 세운 그는 주변을 서성거리다 운동과 산책을 위해 나온 박물관 직원 프랑수아 뒤체스네(56)를 뒤따라가 일본도 모양의 흉기를 휘둘렀다.

공영방송 CBC뉴스에 따르면, 시내를 산책하던 사람들을 무차별  공격하는 지라드를 목격한 시민들은 밤 10시20분쯤 911에 신고했다. 퀘벡 주민들은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고,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기 전 지라드는 바람을 쐬러 나왔던 헤어디자이너 수잔 클레르몽(61)을 공격했다. 중상을 입은 클레르몽은 결국 숨졌다.

지라드가 흉기를 들고 활보하는 사이, 밤 10시50분쯤 퀘벡의 택시회사는 운전사들에게 긴급 공지를 하고 사건 발생을 알렸다. 날씬한 체격에 긴 머리의 20대 청년이 중세시대 복장을 하고 시민들을 칼로 공격했다면서, 용의자를 발견하는 즉시 경찰에 신고하라고 당부했다.

경찰은 자정이 가까운 밤 11시57분쯤 트위터를 통해 긴급 위험문자를 발송했다. 1분 뒤에는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는 2차 긴급문자를 잇따라 전했다. 지라드는 11월1일 새벽 1시쯤 퀘벡시티 항구 인근에서 체포됐다. CBC방송은 사건 발생 후 경찰의 대응이 적절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긴급문자는 사건이 처음 발생한 후 1시간30분이 지나서야 발송됐으며, 용의자가 3시간 가까이 시내를 활개치고 다녔다는 것이다.

경찰에 체포된 지라드는 약 5년 전 정신과 상담 과정에서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11월1일 오후 사건 브리핑에서 “다만 지라드가 과거에 폭력적 사건을 저지른 사례는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면서 “정치적·종교적 동기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고 밝혔다. 경찰은 지라드를 체포한 직후 지역 병원에 데려가 정신감정을 실시했다.

핼러윈 밤에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 이후 퀘벡 주정부는 내년에 1억 캐나다달러(약 860억원)를 정신건강 프로그램에 투자하겠다고 11월2일 밝혔다. 이 예산은 정신건강과 관련한 공공 프로젝트는 물론 정신과 상담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지원에도 투입될 예정이다. 예산안은 당초 12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이번 사건으로 공개를 앞당겼다. 주정부는 3500만 캐나다달러는 정신건강 서비스에 배정하고, 특히 1000만 캐나다달러는 17~34세 학생과 청년들을 돕는 데 쓸 예정이다. 퀘벡 주정부 측은 10대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정신상담을 필요로 하는 수요가 많다고 지적했다. 500만 캐나다달러는 자살 방지 온라인 프로그램에 투입할 계획이다.

캐나다 민영방송 CTV뉴스에 따르면 퀘벡주에서 정신상담을 요청하고, 정부 지원을 기다리는 사람은 1만6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퀘벡주의 리오넬 카멘트 사회서비스 장관은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주민들의 정신건강이 큰 위협을 받고 있다”면서 “이번 사태는 예측하기 어려운 불행이었다. 정신건강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지라드처럼 사람들을 공격하지는 않지만 정부 차원의 정신건강 서비스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퀘벡시티의 레기스 라보메 시장도 11월1일 “연방 국회에서 정신건강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뤄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앞으로 코로나19 유행이 지속된다면 캐나다 대도시에서  시민들의 정신건강이 주요한 이슈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수아 르고 퀘벡 주총리도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정신건강 문제가 크게 떠오르고 있다”며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것 모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정신건강 예산을 늘리는 데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아주 소수의 사람이 정신문제 때문에 폭력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중앙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겨울에 우울증 호소 사례 더 늘어날 것”

최근 퀘벡주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많은 주민이 코로나 사태 이후 정신건강이 크게 악화됐다고 답했다. 86%의 정신과 환자들은 코로나19가 시작된 이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70%는 우울감을 호소했으며, 50% 이상은 무엇인가에 집중하거나 기억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캐나다의 겨울은 거의 6개월간 지속된다. 11월1일 밤 캐나다 최대 도시 토론토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첫눈까지 내렸다. 캐나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코로나 사태가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겨울에 접어들면서 우울증 등을 호소하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길고 잔인한 겨울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토론토대 심리학과의 로버트 레비튼 교수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고립된 생활이 지속되고, 외출을 통해 햇볕을 쬘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줄어들었다”면서 “이는 겨울철 시민들의 정신건강에 큰 악재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캐나다 인구 가운데 5%는 겨울철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거나 식욕이 줄고, 일상에 흥미를 잃는 등 우울증을 앓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코로나19 감염자가 겨울철에 늘어나고 자가격리 등 지침이 강화되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례가 증가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특히 장기간 실직 상태가 계속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다면 분노 조절 장애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피오이드(아편류의 합성마약) 과다 사용에 따른 사망자도 코로나19 이후 급증하고 있다. 브리티시 콜롬비아주에 따르면 약물 과다 사용에 따른 사망자는 지난 5월 이후 매달 170~180명씩 발생했다. 이는 지난해 6월 76명 수준이던 것과 비교하면 매달 100명 이상 대폭 늘어난 것이다. 약물 과다에 따른 신고전화도 75%나 폭증하고 있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정신적 스트레스 증가를 의미하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이제는 우울증을 넘어 화병이나 분노를 의미하는 ‘코로나 레드’ 시대가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퀘벡시티처럼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