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컨설팅그룹 DNA’ 긴급수혈 나선 대기업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0.12.23 14:00
  • 호수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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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인앤드컴퍼니 등 글로벌 업체 이력 각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갈수록 악화하면서 소상공인, 중소·중견기업은 물론 대기업까지 흥망의 기로에 몰렸다. 상대적으로 여력이 있는 대기업들은 위기 대응을 넘어 환골탈태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장기전에 들어간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변화하고 혁신해야만 살아남고 미래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이런 생존 프로젝트에서 도드라지는 대목이 있다. 바로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베인앤드컴퍼니, 맥킨지 등 글로벌 경영 컨설팅 업체 출신 임원들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다. 

재계에 따르면, 현재 삼성전자·현대자동차·LG·롯데·포스코·한화·GS·신세계그룹 등 국내 주요 대기업에서 코로나19 시대의 변화·혁신 전략을 담당하는 임원은 모두 전직 컨설턴트다. 관행, 순혈주의로 점철된 기업들도 글로벌 컨설팅 업체 출신들을 속속 구원투수로 올렸다. 

ⓒ일러스트 정찬동

롯데그룹은 지난 10월 BCG 출신 정경운씨를 롯데쇼핑 헤드쿼터(HQ) 기획전략본부장(상무)으로 스카우트한 데 이어 11월 정기인사 때도 BCG 출신인 강성현 롯데네슬레코리아 대표이사를 롯데마트 대표이사(전무)로 임명했다. 새로 영입된 정 본부장은 BCG 컨설턴트로 근무한 후 동아ST 경영기획실장 등을 역임했다. 강 대표는 한국까르푸와 BCG를 거쳐 2009년 미래전략센터 유통팀장으로 롯데에 합류했다. 

‘순혈주의’, 즉 공채 출신 중심의 조직문화로 유명한 롯데가 달라진 데는 ‘이대로 가선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롯데는 이커머스 시대 등 시장 변화에 뒤처져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국내외 경기 침체까지 맞으면서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올 1, 2분기 롯데의 양대 축인 유통과 화학 부문 모두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에 비해 추락한 뒤 3분기에 반등했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실적 개선세를 지속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신동빈 롯데 회장이 더욱 크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쪽은 유통, 즉 롯데의 본업(本業)이다. 형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의 갈등이 상존하고, 아들 유열씨로의 3세 승계 준비에도 착수한 만큼 지배구조 개선 등 경영권 강화 작업이 절실한 신 회장이다.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없는 유통 부문 실적은 호텔롯데 상장을 가로막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신 회장이 롯데를 상징하는 롯데쇼핑의, 그것도 미래 먹거리 발굴과 구조조정 등 막중한 임무를 글로벌 컨설팅 업체 출신들에게 맡긴 것은 내외부에 혁신 의지를 설파하는 상징적 행위와 다름없다”며 “향후 임원 인사에서도 이런 흐름이 지속·확대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롯데가 BCG 출신 임원들을 선택했다면 유통 라이벌인 신세계그룹은 베인앤드컴퍼니 출신 전성시대다. 공교롭게도 BCG와 베인앤드컴퍼니도 컨설팅 업계의 대표적인 라이벌이다. 이마트는 지난해 2분기 창립 이래 첫 영업적자를 기록한 뒤 대표이사 사장을 강희석 전 베인앤드컴퍼니 소비재·유통 부문 파트너로 교체했다. 1993년 이마트 창립 이래 첫 외부인 출신 대표였다. 

위기 앞에서 사라진 ‘순혈주의’ 

강 대표는 취임 후 1년간 이마트 점포 30% 리뉴얼, 신선·가공식품 사업 강화 등 체질 개선을 통해 실적 증대에 매진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10월15일 강 대표가 그룹 통합 온라인몰인 SSG닷컴 대표도 함께 맡도록 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강 대표는 베인앤드컴퍼니 동료였던 최영준 최고전략책임자(CSO)까지 티몬에서 데려왔다. 

GS그룹도 11월 임원 인사에서 베인앤드컴퍼니 출신 박솔잎씨를 경영전략본부장(전무)으로 임명했다. 박 본부장은 삼성전자, 베인앤드컴퍼니, 이베이코리아에서 일하다 2008년 GS홈쇼핑 라이프스타일사업부장(상무)으로 발탁됐다. 이후 삼성물산 패션 온라인사업 담당 상무를 거쳐 GS홈쇼핑에 재합류했다. GS홈쇼핑과 GS리테일의 합병 시너지 전략을 박 본부장이 세울 전망이다. 박 본부장을 비롯한 외부 출신 3명이 포함된 이번 임원 인사에 대해 GS 관계자는 “전문성과 디지털 역량을 갖춘 외부 인재를 발탁하고 외부 환경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애자일(Agile·기민)한 조직구조를 갖추는 데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역시 보수적인 조직문화를 지닌 한화·포스코그룹도 위기 앞에서 바뀌었다. 한화는 9월 코로나 위기에 신축적으로 대응한다는 취지로 10개 계열사 대표이사 인사를 조기에 단행했다.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전략부문장(부사장)의 대표이사 사장 승진 못지않게 주목받은 인사가 박흥권 한화종합화학 사업부문 대표이사 사장 선임이었다. 맥킨지 출신인 박 사장은 지난해 ㈜한화 전략실장(사장)으로 합류했다. 그룹 차원의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과 인수·합병(M&A), 투자 등을 주도하다가 더 큰 직책을 담당하게 됐다.  

포스코에서는 베인앤드컴퍼니 출신 오규석 신(新)성장부문장(부사장)이 직함 그대로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 포스코 입사 전 오 부문장은 베인앤드컴퍼니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다가 LG텔레콤, 하나로텔레콤, C&M커뮤니케이션, 대림산업 등 다양한 기업에서 사업 전략을 수립했다. 그가 이끄는 포스코 신성장부문은 2차전지와 소재 등 포스코의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 데 주력하는 중이다. 

ⓒ연합뉴스·한화·신세계·롯데 제공

재벌 3~4세 시대 핵심 참모로 떠올라 

앞서 최정우 포스코 회장은 취임 후 첫 정기인사인 ‘2019년 임원 인사’에서 오 부문장을 전격 발탁했다. 철강부문을 철강·비철강·신성장 3개 부문으로 확대 개편하고, 부문별 책임경영 체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조직개편과 함께였다. 철강에 천착하던 포스코가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고, 게다가 핵심인 미래 생존전략을 외부 인사에게 맡긴 것은 파격 그 자체였다. 코로나19 사태로 경기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오 부문장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삼성그룹과 LG그룹에서도 베인앤드컴퍼니 출신 임원들이 핵심 전략을 짜고 있다. 신성장 드라이브를 걸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018년 데이비드 은 삼성넥스트 사장을 최고혁신책임자(CIO)로 임명했다. 은 CIO는 구글 콘텐츠 파트너십 총괄 부사장, 타임워너 미디어 통신그룹 최고담당자, 베인앤드컴퍼니 경영 컨설턴트 등으로 일했다. 은 사장은 삼성넥스트 사장으로서 스타트업 투자와 우수 인재 확보, 신사업 발굴에 주력하는 동시에 삼성전자 사업부문별 혁신전략을 총괄 지휘하게 됐다. 이어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엔 베인앤드컴퍼니에 있던 구자천 파트너를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 시스템LSI사업부 기획팀 상무로 채용했다. 구광모 LG 회장은 2018년 홍범식 베인앤드컴퍼니코리아 대표를 경영전략팀 사장으로 영입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17년 미래 성장동력 발굴을 위해 전략기술본부를 신설하고 신사업 전문가 지영조씨를 본부장(부사장)으로 스카우트했다. 지 본부장은 맥킨지와 액센츄어에서 글로벌 기업들을 대상으로 경영전략, 마케팅 등을 컨설팅한 경력을 갖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전사 중장기 전략 수립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지 본부장은 2018년 12월 사장으로 승진했고, 올해 10월 정의선 회장 취임과 함께 정 회장 핵심 참모진으로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오너 자녀들도 줄줄이 ‘컨설턴트 스펙’ 

대기업들이 ‘인(in) 코로나’ 내지 ‘포스트(post) 코로나’ 생존법을 모색하면서 유독 글로벌 컨설팅 업체 출신들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액센츄어 컨설턴트 출신으로 현재 모바일 구인·구직 플랫폼 원티드를 운영하는 이복기 원티드랩 대표는 “요즘 기업들 상황이 워낙 좋지 않다. 장기 불황에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위기까지 겹쳐 해 오던 사업이 출렁이고 새로운 시도를 해 보려 해도 제약 사항이 수두룩하다”면서 “이 안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는 가운데 컨설턴트 출신들을 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글로벌 컨설팅 업체 소속 컨설턴트들은 다양하고 새로운 산업 분야·주제에 대해 빠르게 학습하고 분석한 뒤 솔루션을 도출해 현업의 베테랑들을 설득하고 실제로 적용하는 사이클에 워낙 익숙하다”며 “컨설턴트 출신들이 높은 성취욕, 커리어 성장욕을 기반으로 밤샘 리서치 등 격무를 감당하는 데도 훈련이 잘돼 있어 요즘처럼 스트레스풀한 경영 환경에서 강점을 발휘할 듯하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기업 컨설팅 업무의 핵심은 관행이나 내부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산업·기업별 성공 요인들을 빠르게 차용해 혁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 문장 주어를 기업 오너십으로 바꿔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 환경 속 세대교체기까지 거치고 있는 대기업에서 ‘글로벌 감각’ ‘혁신’ ‘신성장동력 발굴’ 등은 곧 총수의 핵심 역량이다. 그렇다 보니 재계 총수들은 경영권을 물려받을 자녀들에게도 글로벌 컨설팅 업체 이력를 ‘스펙’으로 만들어주는 분위기다. 

기업 경영 성과 평가업체 CEO스코어가 경영에 참여 중인 국내 100대 그룹 총수 자녀 157명 중 학력(114명)과 경력(126명)이 확인된 이들을 조사한 결과, 가족 회사에 곧바로 입사하지 않고 타사에 근무하다가 들어온 사람은 58명(46.0%)이었다. 

이들이 경력을 쌓은 곳 중에서 경영컨설팅·금융 분야가 30명(51.7%)으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 광고·마케팅 7명(12.1%), 변호사와 영업·판매 각각 3명(5.2%) 순이었다. 경영 컨설팅 및 금융 경력자의 경우 BCG 출신이 6명으로 가장 많았다. 액센츄어 3명, 커니·모건스탠리·베어링포인트·베인앤드컴퍼니·삼정KPMG가 각각 2명으로 뒤를 이었다. 앞서 해외 명문대 경영학 석사학위(MBA) 취득이 재벌가 후계자들의 코스로 각광받았는데, 이제 글로벌 컨설팅 업체 근무가 또 다른 트렌드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이런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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