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파기, 네 글자에 결혼식이 날아갔다
  • 이원석 기자 (lws@sisajournal.com)
  • 승인 2021.01.13 08:00
  • 호수 163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혼집 마련 좌절된 30대 기자의 ‘영끌’ 분투기

오만했다. 신혼집 마련을 위한 3종 세트를 준비했기에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우선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 내 영혼의 크기는 서울의 집을 담기엔 턱도 없이 작았다. 그래서 서울 밖으로 나왔다. 직장이 있는 서울로 출퇴근이 가능하면서도 집값은 그 절반 수준인 곳. 그렇게 일산을 신혼의 터로 잡기로 했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이미 일산의 집값도 만만치 않았다. 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렇게 ‘영끌+경기도+증여’라는 신혼집 마련 3종 세트를 준비했다. 

그렇게 일산의 23평형 아파트를 찾았다. 호가는 2억9000만원. 1년 전에 비해 크게 오른 가격이다. 일산도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오르고 있다. 불과 6개월 전과 비교해 두 배 가까이 오른 아파트도 있다. 결혼 후 바로 입주할 수 있는 집도 많지 않은데, 그나마 이 집을 찾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직장생활 결과물의 총합으로 계약금 3000만원을 냈다. 감격스러웠다. 

여자친구에게 어깨에 힘 좀 주며 최종 계약일만 기다리던 어느 날,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집주인이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지금 계약을 깨면 계약금 3000만원의 두 배를 토해 내야 하는데요?!” 얄팍한 지식으로 맞서봤지만 그사이 집값이 1억원 이상 올라 위약금은 집주인에게 문제가 안 된다는 세상 무너지는 얘기를 들었다. 

속이 타들어갔다. 계약금 3000만원의 두 배인 6000만원을 손에 쥐게 됐지만 일산의 집값은 감당이 안 될 만큼 더 오르고 있었다. 공인중개업소에서는 최근 일산에서 이런 계약 파기는 아주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면서 혀를 찼다.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계약 파기를 염두에 두고 중도금 계좌를 막아버리는 집주인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시사저널 이종현
ⓒ시사저널 이종현

“집값 잡겠다”던 정부 약속 믿었는데…

‘계.약.파.기’ 이후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조건에 맞춰 집을 다시 구한다 해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게 말로만 듣던 ‘풍선효과’구나 싶다. 두려움이 앞선다. ‘일산도 내겐 사치스러운 공간이었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주말에 파주도 가볼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지만 차마 여자친구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다. 면목이 없다. 내 잘못은 아닌데. 아닌가, 세상을 쉽게 본 내 잘못인가. 자꾸 자책을 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세상 속편한 소리일 수 있다. 정부 말처럼 모두가 꼭 서울 강남에, 아파트에 살 필요는 없다. 전·월세로 살면 된다.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미친 집값’을 본 우리다. 전·월세로 살면서 고통받는 지인들을 수도 없이 봤다. 반복되는 이사와 치솟는 집값을 한탄하며 소주잔을 들이켜던 선배들을 수없이 봤다. 게다가 요샌 전셋값마저 치솟고 있다. 괜찮은 전세를 구하기도 어렵다. 전세는 씨가 말라간다.

계약 파기 전까지 결혼 준비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코로나19였다. 신부를 위해서라도 결혼식은 아름답게 치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그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도 아니다. 결혼식이야 규모를 줄이면 그만이다. 가족끼리 조촐하게 작은 결혼식을 할 수도 있다. 이젠 정말 겁이 난다. 집을 마련하지 못하면 결혼은 언제까지 미뤄야 할까. 집값은 과연 얼마나 더 오르게 될까. 바이러스엔 백신이란 약이 있는데, 미친 집값에는 어떤 처방이 있을까. 과연 잡히기는 할까. “반드시 잡겠다”는 정부의 약속만 믿고 기다리면 될까. 안 되겠다. 여자친구한테 파주까지 가보자고… 말을 다시 삼켰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