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재계 핵심 키워드는 ‘혁신·경쟁’ 대신 ‘고객’
  • 송응철 기자 (sec@sisajournal.com)
  • 승인 2021.01.11 08:00
  • 호수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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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그룹 총수들의 신년사로 본 한국 경제 오늘과 내일
코로나19 사태 영향으로 온탕과 냉탕 오가

신축년(辛丑年)을 맞아 국내 10대 그룹 총수들이 어김없이 신년사를 발표했다. 이 신년사에는 각 기업의 핵심 경영 키워드가 담겼다. 해당 기업은 물론 우리 경제의 현주소와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매년 기업 총수들이 내놓은 신년사의 화두는 신성장동력 발굴과 고객 중심 경영, 사회적 책임 등에 맞춰져 있었다. 여기에 올해는 코로나라는 주제가 추가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이 세계경제를 크게 흔들고 있어서다.

풍파를 맞은 건 우리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코로나 사태로 전례 없던 위기에 직면했다. 문제는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부는 사태 종식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코로나 확산세는 여전한 데다, 변종 바이러스마저 출현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재계에선 올해도 코로나 사태로 인한 경제 충격은 만만치 않으리란 암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자연스레 기업들의 위기감도 높아진 상황이다.

구광모 LG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고객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LG 제공
ⓒ연합뉴스·시사저널 임준선

좋은 실적 올린 그룹 신년사는 ‘미래지향적’

이런 가운데 발표한 재계 총수들의 신년사에는 현재 재계가 처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물론 그룹별로 온도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코로나19 사태에도 호실적을 기록한 기업의 신년사에서는 미래지향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삼성그룹이 대표적이다. 총수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대신 신년사를 발표한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2021년을 ‘한 단계 더 도약을 위한 원년’으로 선포하고 “차세대 신성장 분야를 체계적으로 육성해 미래 10년을 내다보며 새로운 준비를 하자”고 당부했다.

김 부회장의 이런 발언에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해에도 계속 성장해 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실제 삼성은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렸다. 특히 그룹 내 핵심기업인 삼성전자는 지난해 3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58.1% 늘어난 12조3000억원을 기록했고, 4분기 영업이익도 전년 대비 30% 이상 증가가 예상되고 있다. 주가도 급등했다. 코로나 사태 초기인 지난해 3월19일 장중 4만2300원까지 하락했던 삼성전자 주가는 1월6일 장중 8만4500원으로 10개월여 만에 두 배나 증가했다.

현대차그룹도 비슷하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 신년 메시지를 통해 지난해 코로나19 속에서도 기업가치가 상승하는 성과를 이룬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2021년이 ‘신성장동력으로의 대전환’이 이루어지는 한 해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통해 친환경과 미래기술, 사업경쟁력 영역에서 성과를 가시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비교적 호실적을 거둔 SK그룹과 LG그룹은 코로나 위기 탈출 전략 대신 각각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고객’이라는 포괄적인 화두를 제시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신년사에서 “기후변화나 팬데믹 같은 대재난은 사회 가장 약한 곳을 먼저 무너뜨린다. 이런 문제로부터 기업도 자유로울 수 없다”며 “사회와 공감하면서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광모 LG 회장은 디지털 영상 ‘LG 2021 새해편지’를 통해 고객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고객을 LG 팬으로 만들어 나가자”고 주문했다. 최 회장과 구 회장은 지난해에도 같은 주제로 신년사를 발표했다.

ⓒ연합뉴스·시사저널 최준필

직격탄 맞은 그룹들은 위기 탈출에 초점

반면, 신세계·롯데·CJ 등 코로나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그룹들의 신년사는 앞서 언급한 그룹들과 온도차가 명확했다. 이들 기업의 신년사는 모두 코로나 사태를 전례 없던 위기로 인식하고, 이런 상황을 이겨내자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실제 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은 유통사업 전반이 코로나19로 타격을 받아 실적 악화를 겪고 있다. 이런 위기를 견디기 위해 두 그룹은 지난해 부실 점포를 연이어 폐점하는 등 고강도 구조조정을 단행한 바 있다. CJ그룹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특히 외식·극장사업 부문은 코로나 사태의 여파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시장에서 계속 계열사 매각설이 나돌 정도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코로나19 사태를 ‘흑사병’에 비유했다. 그만큼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 부회장은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는 희망적인 메시지도 전달했다. 그는 신년사에서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후 르네상스라는 화려한 꽃이 피었다”며 “지금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내고 10년, 20년 지속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판을 바꾸는 대담한 사고로 도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그룹의 현주소를 성찰했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는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업계를 선도할 정도로 탄탄한 경쟁력을 쌓아왔다고 자부했다”면서도 “하지만 유례없는 상황에 우리의 핵심역량이 제 기능을 발휘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코로나 사태를 ‘벽’에 빗댔다. 다만 그는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는 인권운동가 안젤라 데이비스의 말을 인용하며 “눈앞에 벽이 있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함께 벽을 눕혀 도약의 디딤돌로 삼는 한 해를 만들자”고 주문했다.

손경식 CJ그룹 회장도 자성으로 신년사를 시작했다. 그는 “팬데믹을 계기로 우리 그룹이 외부 충격을 극복할 수 있는 초격차 역량에 기반한 구조적 경쟁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음을 확인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손 회장은 올해 경영 환경도 녹록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며 “2021년을 최고 인재, 초격차 역량 확보와 미래성장 기반을 강화하는 혁신성장으로 패러다임 시프트를 이루고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도약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이 밖에 다른 그룹들도 공통적으로 올해를 전기(轉機)로 삼자는 각오를 밝혔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향후 2~3년은 산업 전반에 불확실성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며 “사회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속 가능 경영을 글로벌 수준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김 회장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강화해 나가는 동시에 우리의 경영활동 면면에서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태수 GS그룹 회장은 “지난해는 코로나 사태와 함께 불확실성이 심화한 변화의 시기였지만 디지털 전환과 사업구조 개편 등으로 착실히 미래를 준비한 해”라며 “새해는 사업 포트폴리오 재구성으로 미래 경쟁력을 키워달라”고 당부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 회장은 ‘위기를 넘어 미래를 준비한다’를 올해 경영목표로 제시하며 “첫째 실력을 키우고, 둘째 기술이 핵심이 돼야 하고, 셋째 책임경영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고객’ 외에 ‘성장’ ‘번화’ ‘사회’ 등이 많이 언급돼

이번 신년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고객’이다. 기업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올해 10대 그룹 신년사에서 고객은 총 56차례 언급됐다. 이 밖에 성장·변화·사회·미래 등이 차례로 4~5위에 랭크됐다.

반면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인 지난해 신년사 키워드 순위에서 각각 3위와 5위에 올랐던 ‘혁신’과 ‘경쟁’은 2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코로나 사태로 혁신과 경쟁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고객이라는 단어가 10대 그룹 신년사 키워드 상위권에 등장한 건 비교적 근래 들어서다. 3년 전인 2018년 처음으로 신년사 키워드 1위에 오른 뒤 올해로 3년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2018년 이전까지 신년사에서 ‘고객’의 언급 빈도는 후순위였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10대 그룹의 신년사에서 언급된 단어의 순위를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 ‘톱3’는 성장과 세계(글로벌), 경쟁(경쟁력) 순으로 나타났다. 고객은 6위에 머물렀다.

고객 언급 비중이 크게 높아진 2018년은 1인 가구와 밀레니얼 세대 등이 새로운 소비층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린다. 신흥 소비권력으로 부상한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여부가 기업의 흥망을 좌우한다는 판단이 신년사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기업들에 고객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진 것으로 분석된다. 고객들의 니즈(욕구)를 파악해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만 코로나 사태에서 비롯된 위기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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