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조각마다 자원이 되는 ‘송프란시스코’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1.1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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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탄의 변화 담은 문화공간 ‘한치각’

평택은 미군의 도시다. 2017년 용산의 미8군 사령부가 평택으로 이전한 이후, 이 도시에 드리운 미군의 존재감은 더욱 커지고 있는 듯하다. 주한미군이 평택에 새로 마련한 둥지인 캠프 험프리스는 미 국방부의 해외 기지 중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미군과 함께 한 평택의 역사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미군뿐만 아니라 중국․베트남․러시아 등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평택으로 모여들고 있다. 덕분에 특색 없는 뜨내기들의 도시라고만 알려졌던 평택이 요즘은 국제도시, 문화다양성의 도시로 재해석되는 추세다.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각양각색 국적의 주민들이 공존하는 평택이지만, 그 사실이 ‘문화다양성’이란 긍정적인 이미지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군 때문이란 시각도 있다.

그 중심에는 ‘송탄’이 있다. 1951년에 만들어진 미군의 오산비행장이 있는 곳이 송탄이다. 현재의 평택시는 1995년 평택시와 송탄시, 그리고 평택군이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미군은 송탄 지역에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불어 넣었는데, 그것이 나름의 프라이드로 자리 잡았다. 그 때문인지 송탄은 지금도 다른 지역보다 외국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지난해 말, 송탄 좁은 골목 안에 ‘한치각’이란 새로운 문화공간이 오픈했다. ⓒ협업공간 한치각
지난해 말, 송탄 좁은 골목 안에 ‘한치각’이란 새로운 문화공간이 오픈했다. ⓒ협업공간 한치각

한치각이 익선동․을지로와 다른 점

송탄의 오산비행장 앞 신장 쇼핑몰거리는 서울 이태원 못지않게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송프란시스코’란 별명에서도 미군의 진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거리에 들어서니 초입에서부터 햄버거 굽는 냄새가 오감을 자극했다. 코로나 이후 미군들이 부대 밖 출입을 안 하게 되면서 예전만큼의 활기는 없었지만, 특유의 정취는 여전했다. 햄버거 가게 앞에는 외국인이 대부분인 듯한 한 무리의 바이크족이 왁자지껄 모여 있었다.

지난해 말, 송탄에 새로운 문화공간이 생겼다. ‘한치각’이란 곳이다. 송탄의 독특한 역사와 경관에 매력을 느낀 두 활동가가 만든 작은 전시관이자 아지트였다. 좁은 골목 안에 자리 잡은 한치각은 새롭게 덧붙여진 디자인과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벽면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 모습이었다.

송탄은 바이크 동호회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김지나
송탄은 바이크 동호회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김지나

바이크족이 작은 햄버거 가게 앞에 모이는 풍경, 미로처럼 얽혀 있는 낡은 골목, 미군부대 주변에 들어선 오래된 숙박시설들.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송탄의 일상이지만 한치각의 사람들은 이것을 ‘자원’이라고 부른다. 이런 요소들을 지역의 문화콘텐츠로 발전시키고 싶다는 이야기가 소박하면서도 고무적이다. 그런 것도 ‘자원’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면, 의미를 발견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모든 대상이 곧 자원이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한치각 공간 자체가 바로 그러한 예였다. 한치각이 자리를 잡은 이 2층짜리 건물은 한때 미군을 상대로 영업하던 유흥시설이었다고 한다. 공간 곳곳에는 옛 건물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리모델링을 하는 과정에서 벽 속에 파묻혀 있던 옛날 신문과 전단지들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이런 것들도 한치각에서는 귀중한 ‘자료’이자 ‘전시품’이었다. 서울의 익선동이나 을지로 상권에서 많이 보이는 뉴트로 현상과 겉모습은 비슷할지라도 속의미는 달랐다.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미군이 이끈 송탄의 시작과 전성기를 평택의 도시문화로 다시 버무리는 시도였다.

한치각의 내부 공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신문자료 등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김지나
한치각의 내부 공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신문자료 등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김지나

도시의 생기 빼앗는 코로나

한치각의 이름 앞에는 ‘협업공간’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다. 송탄의 지역 주민들, 특히 청년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이란 목표를 담았다. 평택은 어린 청년들이 머물고 소통할만한 공간이 별로 없다고 한다. 송탄국제교류센터 인근의 신장근린공원이 이들의 유일한 오픈스페이스라는 사실이 씁쓸했다. 이 공원에서는 평택의 젊은 세대들이 국적을 불문하고 서로 어울리는 광경을 볼 수 있는데, 좋은 물리적 기반이 더 뒷받침된다면 이들의 어울림은 새로운 문화로 발전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게 하기도 했다.

한치각은 그런 가능성이 점쳐지는 공간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제대로 된 개시를 못하고 있는 점이 안타까웠다. 코로나가 앗아간 것은 경제적 활력만이 아니었다. 도시의 문화적 가능성도 함께 위축되고 있었다. 한번 싹틔워진 문화의 씨앗은 온라인을 통해 더 빠르고 멀리 확산될 수 있겠지만, 씨앗을 심고 보살피는 데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함께 일구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송탄이 미군들의 거리에서 진짜 ‘문화다양성’의 도시로 꽃피게 될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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