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계 학폭, 드러난 건 ‘빙산의 일각’
  • 기영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2.20 14:00
  • 호수 16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명 선수에게 입은 피해는 어디 호소할 데도 없어
대부분 공소시효 지나 속앓이만

2월초 여자 프로배구단 흥국생명의 팀 내분으로 불거진 학교폭력(학폭) 사태가 다른 여자배구팀, 남자배구팀에 이어 타 종목으로까지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여자배구의 어벤져스팀으로 불릴 정도로 절대강자의 위치에 있던 흥국생명의 ‘3대 보물’이었던 김연경 선수와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 간 갈등으로 시작되었던 ‘흥국생명 사건’이 학폭으로 이어지면서 사회문제화되고 있다. 더군다나 외신까지 관련 보도를 하면서 국위 손상에 이르고 있다.

쌍둥이 자매 중 동생인 이다영이 개인 SNS에 7년 선배인 김연경 선수(32)를 저격하는 듯한 글을 올리면서부터 학폭 파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다영의 SNS 글이 오히려 부메랑이 된 것이다.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이재영(왼쪽), 이다영 선수ⓒ연합뉴스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이재영(왼쪽), 이다영 선수ⓒ연합뉴스

부메랑 된 이다영의 SNS, 학폭 논란 일으켜

중학교 배구선수 시절, 이재영·다영 자매에게 학폭 피해를 당한 피해자는 “‘괴롭히는 사람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죽고 싶다’고 가해자(이다영)가 글을 올렸더라. 본인들이 했던 행동들은 새까맣게 잊었나 보다”라면서 “본인도 한 사건의 가해자면서 저희에게 어떠한 사과나 반성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도망치듯 다른 학교로 가버렸으면서 저런 글을 올렸다는 것이 너무나 화가 나면서 황당하다. (쌍둥이) 가해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온 건가. 미안한 마음이 있기나 한 건가”라고 폭로했다.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학창 시절 (쌍둥이들에게) 학교폭력을 당한 사람이 자신을 포함해 최소 4명”이라면서 폭행·폭언·갑질 등 21가지 피해 사례를 열거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에 의해 자신들이 학창 시절 저질렀던 학폭의 내용들을 본 쌍둥이 자매는 자필로 사과문을 올린 뒤 흥국생명 합숙소를 빠져나갔다. 곧이어 설 연휴 기간 중이던 2월13일 OK금융그룹 배구단의 송명근·심경섭 선수의 학폭 사건이 터졌다. 두 선수는 곧바로 시인을 하고 올 시즌 남은 경기를 포기하겠다고 말했고, OK구단도 두 선수에게 올 시즌 남은 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내렸다. 설 연후 직후인 2월15일, 과거 쌍둥이 자매에게 시달리다 숙소의 옆산으로 도망쳤다는 또 다른 내용의 새로운 피해자 폭로가 이어졌다. 또 다른 피해자는 쌍둥이 자매가 아닌 다른 팀의 여자 프로배구 선수로부터 피해를 당했다고 자신의 SNS에 피해 사실을 올렸고, 구단과 가해자 차원에서 이를 무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했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2월16일 서울 마포구 KOVO 회의실에서 ‘배구계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학교폭력 연루자에게 최고 ‘영구제명’을 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정작 이번 사태의 당사자들인 이재영·다영 자매와 송명근·심경섭 등은 소급 적용이 되지 못해 대상에서 빠지는 촌극이 벌어졌다.

흥국생명은 이재영·다영 자매에게 무기한 출전정지 처분을 내렸고, 대한배구협회도 국가대표 자격을 무기한 정지시켰다. 흥국생명은 이재영(옵션 포함 6억원)과 이다영(옵션 포함 4억원)의 연봉도 일단 지급하지 않을 방침이다. 향후 법적인 판단을 받아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자매 논란의 불똥은 그 어머니에게도 튀었다. 어머니 김경희씨는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배구 대표팀에서 세터로 뛴 국가대표 선수 출신인데, 이번 학폭 논란이 불거진 후 김씨가 딸들의 학창 시절 팀 전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대한배구협회는 2월15일 ‘2020 배구인의 밤 행사’에서 김씨가 받은 ‘장한 어버이상’의 수상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배구협회는 김씨가 두 딸을 국가대표 선수로 길러낸 공로를 인정해 이 상을 주었지만, 최근 불거진 학폭으로 인해 그 같은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협회는 조만간 열릴 이사회에 김씨의 수상 취소를 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이다.

2월16일 흥국생명의 김연경이 IBK기업은행과의 여자 프로배구 경기에서 잇따른 팀 실점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연합뉴스
2월16일 흥국생명의 김연경이 IBK기업은행과의 여자 프로배구 경기에서 잇따른 팀 실점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연합뉴스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김연경, 미담 끊이지 않아

체육계에서는 이번 남녀 배구를 비롯한 학폭 사태가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다. 그나마 가해자가 이재영·다영 자매처럼 유명 선수일 경우 주목을 끌 수 있지만, 무명 선수들에게 피해를 입은 경우에는 호소할 데도 없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학폭이 이미 민형사상 공소시효(폭력의 경우 5년, 상해를 입혔다면 7년)가 지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지금도 속으로만 끙끙 앓는 피해자가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배구뿐만 아니라 축구·야구·농구·육상·스피드스케이팅 등 모든 종목에서 자행됐던 크고 작은 학폭의 피해자들은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7월말 외국에서의 선수생활 11년 만에 원래 소속팀인 흥국생명에 합류한 세계적인 배구 스타 김연경은 이번 사태로 인해 오히려 더 빛나는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어린 후배들과 친해지기 위해 몸을 낮추고 후배들에게 적극 다가서려고 노력했던 미담들이 속속 공개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김연경은 “처음 보는 선수들이 몇 명 있어서 이름 외우느라 고생하긴 했다. 이름도 외우고 내가 먼저 다가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밥 먹을 때 내가 대화를 주도적으로 하고 있다. 후배들이 내가 없으면 허전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말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연경은 이번 ‘흥국생명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이기도 한데, 쌍둥이 자매의 학폭 사태가 터지면서 철저히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09년 일본에 진출하면서 흥국생명의 모기업인 태광그룹 산하 ‘일주학술문화재단’에 배구 발전을 위해 장학금을 내놓기 시작했고, 그 후 일주학술문화재단을 통해 여자배구 꿈나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김연경의 고등학교 선배 선수였던 A씨는 “후배 선수들이 선배들의 유니폼은 물론 속옷까지 손빨래를 해야 했던 오래된 관행을 (김)연경이가 바꿔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선배가 되어서도 김연경은 후배들을 챙기는 강한 리더십을 여러 차례 선보여 화제를 일으켰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당시 한국 여자배구가 20년 만에 우승을 하고도 협회가 예산을 핑계로 김치찌개 회식을 잡자 후배 선수들이 푸대접을 받는 것에 화가 난 김연경은 자신의 사비로 고급 레스토랑에서 회식을 시켜준 일화가 있다. 여자 프로배구의 샐러리 캡(팀 연봉 총액 상한액 23억원) 제도 때문에 터키 등 해외 무대에서 세계 최고 대우를 받았던 21억원 이상의 연봉을 포기하고 한국에 복귀해 3억5000만원에 도장을 찍기도 했다. 당시 김연경은 팀에 “나 때문에 후배들의 연봉을 깎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