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소스’로 시작된 독일의 인종차별 반성
  • 이수민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3.09 16:00
  • 호수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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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위주의 토크쇼 내용 두고 논란…최근엔 BTS 비하 발언으로 파문 일으키기도

지난해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사건은 세계인들의 집단 기억에 각인됐다. 이 사건이 특별했던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이에 대항하는 시위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소수인종에 대한 공권력의 과잉폭력 사건은 수차례 있어 왔다. 하지만 주로 미국 내에서 발생했고, 이번과 같이 국제적 공분을 사지는 못했다. 그만큼 인종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세계적으로 높아졌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독일에서도 전국적으로 ‘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가 열렸다. 특히 독일은 나치 과거 때문에 인종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인종차별주의는 그 역사가 깊기 때문에 사회의 언어·문화·일상에 녹아 있다. 이 때문에 이를 단번에 잘라내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단순히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명제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범주에서 차별적인 언어와 사고를 바꾸려는 노력들은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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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비하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독일 라디오 ‘바이에른3’의 진행자 마티우스 마투쉬케ⓒ유튜브 캡쳐

“집시소스의 개명이 정당한가”에 비판 제기

이와 관련해 최근 독일 사회에서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내용이 많은 논란을 낳았다. 서부독일방송(WDR)에서 1월29일 방영된 프로그램은 《마지막 심급》이라는 토크쇼로, 연예인들을 게스트로 초청해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취지는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하고, 마지막에는 관객 투표와 온라인 투표를 통해 주제에 대한 여론을 파악하는 것이다. 문제의 방영분에서는 인종차별주의적인 언어 개정을 주제로 삼으며 다음 질문을 제기했다. “‘집시소스’의 개명이 정당한가?”

‘집시소스’란 토마토 베이스의 소스로, 양파 및 파프리카 맛이 강한 매운 소스를 일컫는다. 문제는 ‘집시’가 전통적으로 ‘롬인’(집시계 민족 중 하나로, 나치 독일의 가스 학살 등으로 약 60만~80만 명이 살해되었음)들을 비하하는 단어라는 점이다. 마치 과거 흑인을 ‘깜둥이’라 부르던 것과 유사하다. 이 때문에 집시소스의 사용 역시 문제시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독일에서 유명한 제과류인 ‘모어콥프’ 혹은 ‘네거쿠스’가 있다. 번역하면 ‘무어인 머리’와 ‘니그로 키스’라는 이름의 이 제과류는 비스킷 위에 마시멜로를 초콜릿으로 코팅한 것인데 여기서 ‘무어인(이슬람교도)’과 ‘니그로(흑인)’라는 표현이 특정 인종을 비하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사용이 금지되고 있다.

토크쇼 게스트들의 의견은 자신들이 어렸을 때부터 사용한 음식 명칭에 인종차별적 의미를 부여하며 사용을 금기시하는 것은 과하다는 방향으로 쏠렸다. “식당에서 집시소소를 곁들인 슈니첼(독일식 돈가스)을 주문하면서 롬인을 비하할 의도와 생각은 전혀 없었다”며 이 표현들을 옹호했다. 이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에 의한 실질적 가해는 이렇게 사소한 언어 사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폭력 때문”이라며 “이 부분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한마디로 이 같은 논의 자체가 지나치게 예민하게 구는 것이란 얘기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한 게스트는 독일 내 청소년 문학의 고전이라고 여겨지는 아스트리트 린드그렌의 소설 《말괄량이 삐삐》의 예를 들었다. 독일에서 몇 년 전, 이 책에 ‘니그로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인종차별적 표현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읽혀선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말괄량이 삐삐》를 읽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과연 해당 표현 때문에 인종차별적 생각을 갖게 됐느냐는 반문이었다. 문제의 표현을 지금 우리 실정에 맞게 마음대로 고쳐야 하는지, 아니면 작가의 의도를 훼손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냥 두어야 하는지,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명쾌하지 않다.

특정 인종의 비하적 의미를 담은 표현들의 무해성을 옹호하는 주장들임에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은 지난 2013년 독일 롬인 위원회에서 ‘집시소스’라는 명칭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독일 내에서 흑인을 지칭하는 ‘모어(무어인)’가 언제나 부정적인 것과 결부돼 왔다는 사실이다. 또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삼는 전통 놀이나 문학에서 흑인은 부정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단적으로 ‘누가 검은 남자를 무서워하나’라는 게임은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아이들 사이에서 꽤 유행했다. 술래를 ‘검은 남자’로 상정하고 잡히면 큰일이 난다는 서사를 갖는다. 이러한 역사를 바꿔야 한다는 의식은 분명 커지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다시 토크쇼 《마지막 심급》으로 돌아오자면, 해당 프로그램이 방영된 직후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미디어에서의 반응은 뜨거웠다. 독일 주류사회를 구성하는 백인들로만 이루어진 출연진의 사진과 함께 ‘이것이 독일이 인종차별주의를 논하는 자세’라고 비꼬는 문구를 올리며 비난했다. 어떻게 인종차별적 표현에 대해 토론하면서 인종차별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들로만 프로그램을 구성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서부독일방송은 물론 프로그램에 참여한 게스트들은 공식적으로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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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토크쇼 《마지막 심급》에 출연한 패널들이 인종차별적 발언을 해 논란이 됐다. 비난이 커지자 게스트들은 공식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서부독일방송(WDR)《마지막심급》캡처

더 이상 소수가 아닌 소수들

2월24일에는 독일의 한 라디오 진행자가 한국의 인기 그룹 BTS를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비유하는 막말을 해 역시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켰다. 파문이 커지자 독일 라디오 채널 ‘바이에른3’ 측과 프로그램 진행자 마티우스 마투쉬케는 “부적절한 발언이었다”며 공식 사과했다.

독일은 다문화사회가 된 지 오래됐다. 1960~70년대 외국인 노동자로 유입된 인구뿐만 아니라, 2015년 이후 난민 유입으로 인해 독일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민자 출신은 이미 ‘소수’라고 분류될 수 없을 정도로 인구의 일정 비율을 구성하고 있다. 현재 독일에는 약 170만 명의 난민이 살고 있고, 전체 인구 대비 26%가 이민자 출신이다. 독일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공존할 수 있는 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논의가 커진 이유다.

다각도의 노력이 논의되는데, 그중 하나는 여러 매체에서 다양성이 대변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도 가시화돼야 한다는 의미다. 서부독일방송이 위치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는 이민자 출신 인구가 40%에 이른다. 하지만 실제로 독일 공영방송에서 외국인이 노출되는 비율은 5%에 불과하다. 이번 《마지막 심급》 사태로 인해 현재 많은 사람이 이러한 괴리를 더 제대로 인식하게 됐다. 방송사들 역시 벌써 변화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인종차별주의를 중심으로 다루는 태스크포스(TF)를 방송사 내에 구성하는가 하면, 이민자 출신 연예인들의 노출 빈도를 높이는 등 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기회에 표면적인 인종차별을 비롯해 일상에 녹아 있어 무의식적으로 사용돼 온 비하적 언어 표현이 무엇인지 제대로 성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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