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는 양현종에게 ‘기회의 땅’ 될 수 있다
  • 이창섭 야구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3.16 08:00
  • 호수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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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정상’ 자존심 버리고 스플릿 계약 받아들인 배수진 통할까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한 양현종(33)이 시범경기 첫 등판을 치렀다. 3월8일 LA 다저스를 상대로 1이닝 1실점하며 세이브를 기록했다. 양현종은 첫 두 타자를 잘 처리한 뒤 다음 타자 D J 피터스에게 홈런을 허용했다. 비록 한 점을 내주긴 했지만, 크리스 우드워드 텍사스 감독은 “평정심이 돋보였다”는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양현종의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양현종은 메이저리그 계약이 아닌 마이너리그 스플릿 계약을 맺었다.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야 연봉 130만 달러(약 14억원)를 받는다.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 못하면 마이너리그 선수들에게 책정된 연봉을 받아야 한다. 받는 돈의 차이도 크지만, 무엇보다 환경이 극과 극이다. 몸도 힘들고, 마음은 더 힘들다. 설상가상 지난해 열리지 않았던 트리플A는 최소 한 달 이상 리그 개막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양현종은 스프링캠프 시범경기를 통해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증명해야 한다.

ⓒ연합뉴스

많은 이닝 던질 수 있는 좌완 선발 절실한 텍사스

양현종이 선택한 텍사스는 지난 4년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2015년과 2016년 연속 지구(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우승을 차지한 후 한 번도 5할 승률을 넘긴 적이 없다(통산 245승 301패). 단축 시즌으로 진행된 지난해에는 신축구장 글로브라이프필드를 개장했지만, 22승 38패로 지구 최하위에 그쳤다. 구단주 레이 데이비스는 “현 체제를 유지하는 건 말도 안 된다”며 신임 단장으로 크리스 영을 내세웠다. 수뇌부 교체는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텍사스는 주축 선수들을 트레이드하면서 팀을 바꿨다. 이 과정에서 1선발 랜스 린이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했다. 린은 지난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선발투수였다(6승 3패 3.67). 더불어 많은 이닝을 책임진 이닝이터였다. 2019년과 2020년 텍사스에서 소화한 292.1이닝은 메이저리그 전체 1위에 해당한다. 텍사스는 엘비스 안드루스와 라파엘 몬테로도 내보내면서 리빌딩의 초석을 다졌다.

문제는 이로 인해 당장 선발진에 공백이 생긴 것이다. 아무리 선발투수의 역할이 축소됐다고 해도 선발진을 갖추지 않고 시즌을 치르는 건 무모한 도박이다. 단축 시즌을 제외한 텍사스의 지난 2015~19년 선발진 평균 이닝은 약 887이닝이었다. 여기서 200이닝을 던질 수 있는 린이 빠지면서 남은 투수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1선발을 맡아야 하는 카일 깁슨이 196.2이닝을 던진 것도 3년 전의 일이다. 새롭게 합류한 마이크 폴티네비치 역시 3년 전이 유일한 규정 이닝 시즌이었다(183이닝). 이 두 선수를 제외하면 규정 이닝을 충족한 투수조차 없는 것이 지금 텍사스 선발진의 현실이다. 성적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선발로 내보낼 투수 자체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텍사스에 양현종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KBO리그에서 양현종의 강점은 내구성이었다. 큰 부상 없이 꾸준하게 선발진을 지켜줬다. 지난 시즌도 7년 연속 170이닝 이상 기록을 이어갔다. 같은 기간 KBO리그에서 가장 많은 1290.2이닝을 기록했다. 양현종을 제외하면 1000이닝을 채운 투수는 두산 유희관(1185.0이닝)과 삼성 윤성환(1000이닝)뿐이다.

선발진이 불안정한 텍사스는 많은 이닝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필요하다. 그래서 양현종과 일본의 아리하라 고헤이(28)를 영입했다. 2년 620만 달러(약 70억원)에 데려온 아리하라는 2015년 데뷔 후 매년 100이닝을 넘게 던졌다. 이닝을 메워야 하는 텍사스로선 천군만마다.

텍사스에서 양현종이 유리한 점은 하나 더 있다. 텍사스는 좌완 투수가 부족하다. 정확히 말하면 긴 이닝을 이끌고 갈 수 있는 좌완 투수를 찾기 힘들다. 콜비 알라드(23)가 텍사스에서 선발로 17경기에 등판했지만, 성적은 4승 8패 6.48로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알라드는 통산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0.321에 이른다. 좌완 투수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한 셈이다. 웨스 벤자민(27)과 조 팔럼보(26), 테일러 헌(26)도 선발 경험이 적다.

텍사스 레인저스 양현종이 3월9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연습경기를 덕아웃에서 지켜보고 있다.ⓒAP연합

올해 텍사스는 선발진 운영을 탄력적으로 가져갈 전망이다. 우드워드 감독은 5인 로테이션을 고수한다는 입장이지만, 피기백(piggyback) 시스템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피기백은 선발투수가 3~4이닝 정도를 던진 뒤 또 다른 투수가 나와서 비슷한 이닝을 소화하는 전략이다. 젊은 투수를 키워야 하는 텍사스로선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용은 양현종에게도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다.

리빌딩에 돌입한 텍사스는 젊은 투수들을 키워야 한다. 방향성만 두고 보면 양현종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팀이라고 해서 무작정 젊은 투수만 기용할 수는 없다. 젊은 투수들이 성장하기 까지 시간을 벌어줄 투수가 있어야 한다. 텍사스는 양현종에게 이러한 가교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양현종이 실력 발휘만 제대로 해 준다면 양측 모두 만족할 만한 상황이 될 것이다.

물론 마이너리그 스플릿 계약이 긍정적인 면만 존재할 수는 없다. 메이저리그는 계약이 가지는 지배력이 큰 곳이다. 연봉이 곧 팀 내 입지다. 적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은 그만큼 여러 측면에서 불리하다. 팀 사정에 따라 입지가 흔들린다. 양현종이 메이저리그 계약을 따내더라도 연봉 130만 달러는 그리 큰 액수가 아니다. 130만 달러 이상의 활약을 펼쳐야 하지만, 텍사스가 그에 대한 대우를 해 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정신적·심리적으로도 대비를 해야 한다.

마이너리그 스플릿 계약으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진입한 경우는 적지 않다. 오히려 과거 한국 선수들에게는 흔한 사례였다. 이 가운데 2016년 이대호와 2017년 황재균이 지금의 양현종처럼 당시 마이너리그 스플릿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 데뷔에 성공했다.

더 이상적인 사례는 2017년 앤서니 스와잭이다. 2015년 두산에서 뛰었던 스와잭은 2017년 화이트삭스와 마이너리그 스플릿 계약을 체결했다. 시범경기에서 준수한 성적(8경기 3.55)을 올린 뒤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포함돼 그해 화이트삭스 불펜의 핵심 투수로 거듭나면서 시즌 중반 밀워키가 트레이드를 요구했다(도합 70경기 평균자책점 2.33). 가치를 인정받은 스와잭은 시즌 후 뉴욕 메츠로부터 2년 1400만 달러의 메이저리그 계약을 따냈다.

양현종이 메이저리그로 가는 길은 분명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여느 때와 달리 스프링캠프에서 전력을 다해야 하는 점도 부담스럽다. 다만 텍사스가 양현종을 예의 주시하고 있으며, 마이너리그 스플릿 계약에 반드시 실패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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