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일 주일대사 외면하는 스가 일본 총리의 전략
  • 박대원 일본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3.18 08:00
  • 호수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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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지배’ 강조하며, 한국은 국제법을 지키지 않는 국가란 프레임 씌워

지난 1월 주일 한국대사로 부임한 강창일 대사는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역임한 한국의 ‘지일파(知日派)’ 정치인이다. 그가 지난해 11월23일 신임 주일대사로 내정되자 마이니치신문은 ‘한국, 주일대사에 강창일 한일의원연맹 명예회장을 내정…지일파, 관계개선 모색인가’라는 기사를 게재해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스가 내각은 1월 이임한 남관표 전 주일대사와의 면담뿐 아니라 신임 강창일 대사와의 면담도 보류하기로 결정해, 3월11일 현재까지 모테기 외무상과 강창일 대사의 면담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남관표 전 대사가 부임 후 2주 안에 당시 고노 다로 외무상, 아베 신조 총리와 면담했던 것과 사뭇 대조적이다. 이에 대해 요미우리신문은 3월8일, 일본 측의 ‘이례적인 냉대’라 평가하며 한·일 관계의 냉각이 면담 일정 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보도했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 및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한 한국의 대응에 대한 ‘사실상의 대항 조치’로서 강 대사와의 면담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강창일 대사는 2월12일 외무성 아키바 다케오 사무차관과의 면담을 시작으로, 니카이 도시히로 자민당 간사장, 에다노 유키오 입헌민주당 대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등 일본 정계 주요 인물과 만나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가 3월10일 도쿄 한국대사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동일본 대지진으로 희생된 모든 분들과 유족께 애도와 위로를 전한다”고 밝혔다.ⓒ연합뉴스

일본, ‘가치관 외교’에서 한국 제외해

역시 일본의 ‘지한파(知韓派)’ 외교관으로 알려진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신임 주한 일본대사도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의 면담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보시 대사는 2월26일 외교부를 방문해 신임장을 제출하고 최종건 외교부 제1차관과 만났다. 외교부에 의하면 아이보시 대사는 최 차관과의 면담 과정에서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한 일본 정부 측의 입장을 설명했다. 주한 일본대사로서의 첫 공식 행보부터 해당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밝힌 것은 일본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에 강제징용 판결 및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을 전제조건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난 2월 정의용 장관 취임 이후 한·일 외교장관 간 전화통화가 실시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나 지금 강창일 대사와 모테기 외무상의 면담 보류 등 한·일 외교 당국 간의 커뮤니케이션 부재가 눈에 띄는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를 통해 일본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표명했다.

이에 대해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같은 날 오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양국 간의 현안 해결을 위해 한국이 책임을 지고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돌리기 위해서도, 일본의 일관된 입장에 기반해 계속해 한국 측에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한다는 것에 변함이 없다”고 발언했다.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법적으로 해결이 끝났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고수하며,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측의 구체적인 노력만을 계속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06년 1차 아베 내각 발족 이후 일본 외교정책의 기축으로 제시되고 있는 ‘가치관 외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차 아베 내각 발족 이후 일본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인권·법의 지배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주목해 왔다.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ASEAN·EU·호주·인도 등)를 ‘전략적 파트너’로 규정하고 이들과의 관계 긴밀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계속해 온 것이다. 특히 ‘법의 지배’는 동중국해에서의 중·일 간 영유권 분쟁 및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해결이라는 측면에서 일본 정부가 중시하는 가치다.

일본 정부는 중국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남중국해에서의 인공섬 건설 및 군사기지화를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판함으로써 중국을 국제법과 같은 규범을 준수하지 않는 ‘현상변경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에 대해 법의 지배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국가라는 프레임을 씌움으로써 중국과의 분쟁에서 일본의 정당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이보시 신임 주한 일본대사가 2월26일 정부서울청사 외교부에서 최종건 외교부 1차관과 면담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외교 당국 간 커뮤니케이션 부재 계속될 듯

이렇듯 보편적 가치를 강조하는 전략은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의 외교청서에서 한국은 2014년까지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2015년 발행된 외교청서부터 이 문구가 사라졌다. 또한 2018년 10월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대법원의 판결 직후 고노 다로 당시 외무상은 “한국이 국제법 위반 상태의 시정을 포함한 적절한 조치를 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으며, 스가 총리는 아베 내각의 관방장관이었던 2019년 10월 “국제법 위반 상태를 만들어낸 것은 한국 측”이라고 주장했다.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사법부 판결을 존중한다는 한국의 입장에 대해서도 “국제법상의 의무 위반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해 1월20일 국회 시정 방침 연설에서 “한국은 원래 기본적 가치와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 국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약속을 지키고, 미래지향적인 양국 관계를 구축해 나갈 것을 절실히 기대한다”고 밝혀 한국이 더 이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모테기 외무상은 1월23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에 대한 담화를 발표해 “한국 정부에 대해 국가로서 책임을 갖고 즉시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다”고 했으며, 2월4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는 한국 측 판결이 “국제법에 대한 도전의 문제”라는 것을 국제무대에서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밝혔다. 한국에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는 국가’라는 프레임을 씌워, 일본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자국과 영토 및 역사 분쟁 등을 하고 있는 한국과 중국에 대해 ‘법의 지배’ 가치를 들어 비판하는 한편, 자국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인 법과 규칙을 지키는 모범적인 국가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은 외교 현안과 관련된 적극적인 정보 발신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일본에 우호적인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한편 분쟁 당사국과의 직접적인 소통은 자제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주장에 대한 지지와 이해를 획득하고 이를 기반으로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일본의 전략으로 인해 한·일 외교 당국 간의 커뮤니케이션 부재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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