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원더풀 미나리
  • 송혜진 숙명여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3.19 17:00
  • 호수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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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는 아무 데서나 잘 자란다. 겨우내 우리 집 거실 양지쪽, 작은 수반에서도 미나리가 잘 자랐다. 한 뼘씩 베어 먹어도 며칠 후면 수북이 올라오는 생명력이 신통하고, 겨울 햇살 받으며 투명하게 반짝이는 초록빛도 참 좋았다. 그 뉘신지 ‘겨울날 따스한 볕을 님에게 비취고자, 봄 미나리 살진 맛을 님에게 드리고자’라는 노랫말을 지은 옛날 분과 마음이 통하는 순간도 적지 않았다. 한겨울에 언 몸을 녹여주는 볕이 고맙고, 봄날에 새로 돋아난 미나리 맛이 특히 좋으니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그 마음 말이다. 

이렇게 푸른 미나리를 바라보며 보낸 겨울 끝자락. 영화 《미나리》 개봉 소식을 들었다. 내용이 무엇이든, 작품평이 어떻든 ‘미나리’라는 제목만 보고도 꼭 봐야 할 영화로 점찍었고, 영화를 보기도 전에 나는 감독이 영화 제목을 ‘미나리’라 지은 이유를 눈치챘다. 한국인의 사철 식재료였던 미나리는 어디서든 악조건을 견뎌내며 쑥쑥 잘 자라는 강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인식돼 왔다. 진흙탕이나 오염된 곳을 가리지 않으며, 심지어 미나리를 심으면 땅을 정화하는 힘이 있고, 볕이 없는 응달에서도 잘 자라며, 가뭄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모습을 함께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나리에 부여해 온 ‘먹거리’ 이상의 의미를 영화 속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판씨네마㈜ 제공<br>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 ⓒ판씨네마㈜ 제공

영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이 영화가 좋다는 걸 세상 모두가 알아버렸으니 굳이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래도 한마디는 거들고 싶어진다. 영화 속 노래 얘기다. 영화 속에서 딸 가족과 함께 살러 미국에 온 할머니가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앗은 물가 둔덕에서 무성하게 잘 자란다. 어느 날 손주와 함께 미나리를 뜯으며 할머니는 손주에게 말한다. “미나리가 얼마나 좋은데. 반찬도 해먹고, 김치도 해먹고, 약으로도 쓰고, 아무 데서나 잘 자리니까 누구든지 다 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할머니의 이런 미나리 예찬에 손주는 ‘원더풀~’이라 맞장구를 치며 공감하고, 할머니는 손주의 호응을 기특해하며 ‘그래그래. 원더풀 미나리~’라는 말끝에 슬그머니 가락을 넣어 ‘미나리 미나리, 원더풀 미나리~~’ 노래를 부른다. 

너무도 밋밋한 흥얼거림이라 ‘음악’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 있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미나리》 OST 음원 목록에도 오르지 못했지만, 나는 배우 윤여정이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대로 가락을 실어 노래한 ‘미나리 미나리 원더풀 미나리’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 주제가이자 깊은 울림을 머금은 ‘조용한 클라이맥스’라 여기고 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전한 모든 것이 이 짤막한 노래 한 가락에 담겨 있으니 말이다. 감독의 의도된 연출이었을지, 배우의 즉흥이었을지 알기 어렵지만, ‘미나리 미나리 원더풀 미나리’ 노래가 완성되는 영화 속 장면은 여러 세대를 거쳐 내려온 한국인의 삶의 방식, 언어, 제스처, 창조성의 전수 과정이나 다름없다. 음악감독 에밀 모세리가 만든 《미나리》의 OST가 아카데미 주제가상, 음악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고, 이 중에서도 한예리가 부른 ‘Rain Song’은 특별히 더 아름답지만 미나리의 생명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배우 윤여정의  ‘원더풀 미나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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