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서울시 캐비닛 속 ‘오세훈 용산 백서’ 찾았다
  • 이원석·구민주 기자 (lws@sisajournal.com)
  • 승인 2021.04.09 10:00
  • 호수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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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 2010년 오세훈 백서, ‘사고’ ‘보상’ 강조
‘참사’ ‘생존권’ 강조한 2017년 박원순 백서와 대조

“이 사고(용산 참사)는 과도한 그리고 부주의한 폭력 행위를 진압하기 위한 경찰력 투입으로부터 생겼던 사건입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일주일 전인 3월31일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의 발언이 논란이 됐다. 당시 오 후보는 2009년 재개발 지역에서 농성을 벌이던 임차인 등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한 용산 참사의 원인을 ‘농성자들의 폭력 행위’란 취지로 발언했다. 오 후보는 참사 당시 서울시장이었다. 그는 당시 재개발 과정의 문제점, 공권력의 무리한 진압 등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논란 이후 오 후보는 곧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죄송스럽다”고 사과했다. 그는 4월7일 보선에서 승리해 10년 만에 서울시장직에 복귀했다.

오세훈 신임 시장이 복귀하면서 용산 참사 문제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용산 참사는 과거의 문제지만 민간 재개발·재건축 활성화를 이번 선거에서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던 오 시장이 이 과정에서 향후 생겨날 수 있는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지를 보여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선거 직전 논란이 된 발언이 나온 토론회에서 오 시장은 당시 ‘오세훈 서울시’가 용산 참사 관련 백서(白書)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처음 언급했다. 참사 이후 협상 등에서 당시 서울시가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에 대해 해명하면서다. “백서를 만들어놨는데 언젠가는 공개가 되겠지 했다. 그 자료에 협의 과정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서울시 어디 캐비닛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백서는 공식 문건이다. 백서엔 정제된 표현으로 좀 더 공식적인 입장이 담긴다. 참사가 일어난 12년 전 당시 오 시장의 진심은 뭐였을까. 시사저널은 백서를 수소문했다. 공개된 자료가 아니었기 때문에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서울시에 자료를 요구했다. 그렇게 약 10년 전 제작돼 캐비닛 속에 있던 ‘오세훈 용산 참사 백서’를 입수했다.

시사저널은 2010년 오세훈 시장 시절 서울시가 만든 용산 참사 백서를 입수했다(왼쪽). 4·7 보선 승리로 4월8일 10년 만에 서울시청으로 첫 출근하는 오세훈 신임 시장ⓒ시사저널 임준선·박정훈

‘참사’ 아닌 ‘사고’로 표현한 ‘오세훈 백서’

오세훈 백서는 지난 2010년 12월 발간됐다. 《용산 사고 345일간의 이야기: 사고발생부터 협상 타결까지 서울시의 노력》이라는 공식 명칭이 달렸다. 물론 발행인은 오 시장이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용산 참사를 ‘용산 사고’라고 규정한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고 표현할 것인가는 예민한 문제였다. 실제 오세훈 백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사과문의 단어 하나하나까지 유가족에게는 예민한 문제였다. 예를 들어 이번 사건을 ‘용산 화재 사고’로 할 것인가 아니면 ‘용산 참사’로 표기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이다.” 당시 서울시도 백서를 작성할 때 이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고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서울시가 만든 용산 참사 백서는 한 권이 더 있다. 2017년 박원순 시장 시절 서울시가 용산 참사 8주기를 맞아 《용산참사, 기억과 성찰》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이른바 ‘박원순 백서’다. 이 백서는 대중에게 공개됐다. 서울시가 1년 반 넘게 시간을 들여 1만여 건의 수사기록과 9000여 건의 영상 및 사진자료를 살피고 참사 관련자 50여 명과 심층 인터뷰를 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나왔기에 상당히 상세하고 폭넓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제목대로 ‘박원순 백서’는 이 사건을 ‘참사’로 규정했다. “근본적·구조적 원인을 발본색원해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것.” 서두에 적힌 박원순 백서의 발간 목적이다. “불행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 백서를 만들었다”는 오세훈 백서와 발간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두 백서는 사건 정의에서부터 극명한 차이를 나타냈다. 박원순 백서는 용산 참사가 발생한 핵심 원인으로 세입자 생존권을 보호하지 않는 철거 방식의 재개발 정책을 지목했다. “사업으로 발생하는 개발 이익은 사업 주체 및 토지 등 소유자에게만 집중된다. 개발 과정에서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강제퇴거로 인해 재산상의 손해뿐만 아니라 생계수단을 잃는 문제를 겪게 된다.” 제대로 된 소통과 보상 없이 세입자를 내쫓으려 한 공권력의 행태를 참사의 출발점으로 본 것이다.

반면 오세훈 백서는 사고 경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입자 이주 및 철거진행 과정에서 구역 내 세입자 904세대 중 보상협의가 안 된 ‘전철연’ 소속 세입자 24세대와 타 재개발지역 세입자가 연합하여 보상에 반발하면서 시작되었다.” 최근 오 후보가 “전철연이라는 시민단체가 가세해 매우 폭력적인 형태의 저항이 있었다”고 밝힌 발언과 맥락이 통한다. 오세훈 백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전철연’이다. 협상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 중 하나도 “유가족들이 범대위 및 전철연 등과 함께 행동하고 있어 협상이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점은 박원순 백서에서 인용된 세입자들의 주장과 대조된다. 세입자들은 박원순 백서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용역들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투쟁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며 전철연과 손잡게 된 이유를 밝힌다. 오세훈 백서에는 박원순 백서와는 달리 세입자 입장의 구체적 증언이 담겨 있지 않다.

오세훈 백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참사 유가족들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경찰의 유가족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가령 경찰 유가족에 대해선 이렇게 기록했다. “고(故) 김 경사 어머니는 아들의 싸늘한 시신이 담긴 관을 잡은 채 1시간여가량 오열하며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아들의 관을 놓지 못하다 끝내 실신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다섯 명의 사망자 유가족들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용산 참사가 벌어진 2009년 1월20일 새벽 시위대가 옥상에 설치한 망루가 불타고 있다.ⓒ뉴시스

‘중재자’ 역할 강조한 오세훈 백서

2009년 1월20일 비극이 발생한 후 그해 말까지 유가족들과 서울시·용산구 등의 기나긴 협상이 진행됐다. 협상 과정에 대한 기록 역시 두 백서의 내용은 그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박원순 백서는 “(유가족들은) 너무 지쳐 있었고 (협상을) 계속 끌어갈 수 있는 힘이 없었다고 한다. 협상 타결은 장례를 치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확보한 데 불과하다는 평가가 있었다”고 전했다. 실제 용산 참사의 유가족인 이충연씨는 2018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돌아가신 분들은 차가운 냉동고에 계속 보관돼 있고, 어느 순간 이 정권에선 진상 규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그 정도에서 협상을 마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오세훈 백서는 협상 과정을 ‘드라마틱’했다고 기록했다. 특히 마지막 협상 당일은 이렇게 기억했다. “한국 사회의 갈등과 오해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용산 사고가 화해와 타협을 통해 드디어 유종의 미를 거두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 무엇보다 오랜 시간 고생해왔던 유가족들과 세입자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해냈다는 기쁨이 가장 컸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쌓여왔던 원망과 반목, 갈등과 대립을 진정으로 치유할 길을 찾아냈다는 뿌듯함이 뒤를 이었다.”

해를 넘기지 않고 협상이 타결된 것에 안도감을 수차례 표시한 오세훈 백서는 당시 오 시장의 역할도 높게 평가했다. 백서는 “오 시장이 원만한 사고 해결을 위해 조합과 유가족 대표 간 협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중재하였고, 종교계 인사들과 면담을 통해 협조를 요청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박원순 백서와 오세훈 백서 사이에 또 하나의 차이점이 나타난다. 오세훈 백서는 1부부터 7부까지 서울시 시각에서 협상 과정과 결과, 공(功) 등에 대해 기술하는 데 집중했다. 반면 박원순 백서는 협상 이외에도 인터뷰를 통해 세입자, 유가족의 시각을 담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협상 타결 후 유족들의 심경, 이후의 삶까지도 조명하고 있다.  

오세훈 백서에서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당시의 서울시가 ‘중재자’ 역할에 충실했다는 점을 계속해서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오세훈 백서는 “도심 한복판인 용산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로 유족들이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고통을 호소하고 사건 현장이 그대로 방치되는 현실을 서울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적극적인 중재에 뛰어든 것”이라고 했다. 오세훈 백서에는 서울시가 이 사안에 대해 책임이 있는 주체라고 느껴질 만한 대목은 나오지 않는다.

 

오세훈 측 “백서와 현재 입장 차이 없어”

오세훈 백서는 결론에 해당하는 제7부 ‘용산사고가 남긴 유감과 교훈’에서 협상 타결은 “서울시의 중재 노력은 물론 종교계의 도움, 조합 및 유가족 등의 양보와 타협의 결실”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이런 일각의 시선을 덧붙인다. “일각에서는 용산 사고 재판 결과를 보더라도 ‘불법 폭력 시위’에 의하여 사망사고가 발생했는데, 서울시가 앞장서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것은 법치국가의 원칙에 어긋나고 앞으로의 유사 사례 재발을 조장하는 행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물론 용산 사건은 원칙적으로 관계법에서 정한 보상 기준에 따라 조합에서 이행하여야 할 사항으로 정부에서 직접 보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사건이 조기에 해결될 수 있도록 법적 차원을 떠나 전향적인 자세로 대승적·인도적 차원의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오세훈 백서에는 당시 서울시가 이 사안을 정무적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당초 2월 임시국회는 언론 관계법 등 쟁점법안 처리를 놓고 여야 간 ‘제2차 입법전쟁’이 예고돼 있었다. 그러나 ‘용산 사고’라는 예상치 않은 사건의 후폭풍으로 2월 정국에 돌발변수로 작용할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설 연휴 이후 민심동향에 따라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정치권 안팎에서는 사고의 파장이 확산될 경우 4월 재보선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중략) 서울시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오 시장은 4월8일 10년 만에 서울시청에 복귀했다. 오 시장 측은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관훈토론회 등에서 오 후보의 말의 순서가 조금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지만, 본 의미는 용산 참사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고 밝혔다. 다만 “전철연의 개입으로 인해 세입자와의 협의 자체가 다소 과격해진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선 백서 내용과 지금 오 후보의 현 입장 간에는 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서울시와 유가족이 협상 과정을 서로 다르게 기억한다’는 질문에는 “물론 유가족 입장에선 아쉬움이 컸겠지만 마지막 협상 땐 서로 원만하게 마무리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쳤던 걸로 치면 협상에 참여했던 서울시 관계자들도 굉장히 지친 상태였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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