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최후의 왕은 공양왕이 아니다 [최보기의 책보기]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thebex@hanmail.net)
  • 승인 2021.04.1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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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에서 한양까지 1·2》ㅣ 이승한 지음ㅣ푸른역사 펴냄ㅣ340쪽. 360쪽ㅣ각 권 1만6500원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 학자 야은(冶隱) 길재가 멸망한 왕국 고려(高麗)의 수도 개경을 돌아보며 지었던 시조 회고가(懷古歌)다. 길재는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와 함께 고려 삼은(三隱)으로 불렸는데 고등학교 재학 때 이들의 호를 구별하는 문제가 시험에 자주 나왔기에 ‘목포야, 이정길’로 암기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색과 정몽주는 왕건의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의 조선이 문을 여는 시기의 역사를 힘 있는 자들끼리 권력투쟁의 관점에서 다룬 이승한의 《개경에서 한양까지 1·2》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들이다.

동네 노점상도 아닌 일개 왕국이 망하고 새로운 왕국이 들어서는 일이 하루아침에 뚝딱 일어났을 리 없다. 고려 폐국의 전조는 반원개혁정책을 펼쳤던 공민왕 때를 분기점으로 보는데 이승한의 이전 저작인 《몽골제국의 쇠퇴와 공민왕 시대》에서 이 시기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공민왕에서 고려 역사 이야기를 끝내려니 왠지 마무리가 안 되는 듯한 저자의 아쉬움이 《개경에서 한양까지 1·2》를 집필하게 된 동기다.

1374년 공민왕이 환관에게 죽임을 당한 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1392년까지 18년은 치열한 권력투쟁의 시기였다. 공민왕은 개혁을 위해 승려 신돈을 전면에 내세웠다. 신돈에게는 반야라는 여인이 있었다. 공민왕과 반야 사이에 태어난 아이인 ‘모니노(牟尼奴)’가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된다. 세간에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로서 왕우(王禑)가 아니라 신우(辛禑)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최영 장군은 자신의 딸을 우왕의 후궁으로 들이면서 왕조 사수의 선봉에 선다.

중원의 새 왕조 명나라에 맞선 요동정벌에서 최영과 의견을 달리했던 이성계, 조민수가 위화도 회군을 결행했다. 이는 로마로 치자면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 시기 원나라가 약해지면서 기황후 일족과 친원파의 쇠퇴를 계기로 신진사대부 세력이 부상했다. 목은 이색을 필두로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이었다.

이들은 고려 왕조 개혁파와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는 혁명파로 갈렸다. 이성계와 그 아들 이방원, 책략가 정도전 등에 의해 최영, 정몽주, 조민수 등이 죽임을 당하면서 이씨가 왕위에 오르는 조선(朝鮮) 왕국이 1392년 개국되기에 이르렀다. 개국 후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다른 왕자들과 정도전을 죽인 후 1400년 3대 태종이 됐다. 이때까지가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권력투쟁’의 시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 이도(李祹)가 4대 세종대왕으로 즉위했다. 1418년의 일이다.

우리는 흔히 고려왕조는 공양왕에서 끝나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워 왕에 오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고려 최후의 왕은 공양왕을 무력으로 폐위시킨 이성계로서 그가 국호를 조선으로 개명하고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을 뿐이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기 전에 그를 설득하기 위해, 정몽주가 거기에 답을 했던 시조가 《하여가》와 《단심가》로 우리에게 전한다.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끝났지만 정국은 여전히 펄펄 끓는 도가니탕이다. 저 몇 년 전부터 내년 대선까지를 유력자들의 권력투쟁 관점에서 쳐다보면 도가니가 아니 될 수도 없겠다. 《하여가》와 《단심가》를 아래에 붙인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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