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중국이 미얀마를 놓을 수 없는 이유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4.20 07:30
  • 호수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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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안정적 에너지 공급의 안전판인 미얀마

4월9일 미국 뉴욕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열렸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대사는 회의에서 미얀마 군부와 소유 기업에 대한 제재, 무기 금수 등의 조치를 담은 결의안을 요구했다. 비상임 이사국인 에스토니아도 당장 결의안을 작성하자고 촉구했다. 하지만 이날 회의는 별다른 진전 없이 끝났다. 미얀마 군부를 옹호해 왔던 중국과 러시아가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 유엔 안보리는 두 나라의 찬성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 미얀마인의 실망은 거센 분노로 변했다.

“70일 동안 단지 700명 죽었다. 천천히 해라, 유엔. 우리는 아직 (죽을 사람이) 수백만 명이 남아 있다.” 4월12일 미얀마인들이 사용하는 SNS에는 이런 문구가 담긴 피켓을 든 사람의 사진이 널리 퍼졌다. 아무 역할도 못 하는 유엔을 반어법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중국과 중국인은 19세기부터 미얀마의 광물을 뺏어갔다. 20세기 중반부터는 영토를 점거하고 분란을 일으켰다. 마약을 재배해 미얀마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따라서 최근 미얀마에서 강하게 부는 반중(反中) 움직임은 중국과 중국인에게 누적됐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향후 미얀마 정국에 대한 해법의 키를 쥔 외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이다. 미국과 서구는 아무리 강력한 제재를 취해도 미얀마 군부에 타격을 줄 수 없다. 중국이 미얀마 제1의 무역 및 투자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 10분의 1밖에 안 된다. 게다가 미국에 미얀마는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중국에 미얀마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미얀마는 2832억㎥의 천연가스와 5000만 배럴의 원유가 풍부한 자원의 보고다. 무엇보다 인도양으로 바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중국은 미얀마 군부를 구워삶아 2014년 짜욱퓨에서 쿤밍에 이르는 총연장 2806km의 송유관을 완공했다. 송유관 덕분에 중국은 미 해군이 장악한 말라카해협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에너지 수송로를 확보했다. 동남아 국가들과 영유권 문제로 대립하는 남중국해에서의 충돌 위험도 벗어났다. 경제 발전을 위해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이 필수적인 중국에 미얀마는 안전판을 마련해 주었다.

2월16일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군사 쿠데타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 연합
2월16일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군사 쿠데타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 연합

미얀마 정국 해법 키를 쥔 ‘유일한 외세 중국’

중국은 아웅산 수치 여사의 집권 시기에도 미얀마에 큰 공을 들였다. 수치 여사가 국가고문이 된 뒤 가장 처음 방문했던 나라가 중국이었다. 수치 여사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의 간부들을 중국으로 초청해 환대했고 각종 혜택을 제공했다. 중국 입장에선 자신들의 이권을 지켜줄 파트너라면 수치든 군부든 상관없다. 중국은 소수민족 반군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중국은 여전히 카친족 반군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다. 미얀마군이 카친족 반군을 토벌할 때는 난민들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상황을 경고하면서 견제해 왔다.

다른 소수민족 반군은 군사력이 미미하다. 미얀마 소수민족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샨족은 쿤사가 항복한 뒤 군소 군벌 부대가 연명하는 정도다. 그다음으로 많은 카렌족은 미얀마군의 지속적인 토벌로 반군 규모가 작아졌다. 게다가 내부 분열로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그렇기에 카친족 반군만 일정한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카친족 반군은 중국의 입김에 따라 움직인다. 즉 미얀마 민주 세력이 소수민족 반군과 함께 연방군을 창설해 군부에 대항한다는 목표를 이루기 쉽지 않다. 인력, 장비, 전투력 등에서 반군은 미얀마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은 오래전부터 미얀마의 발전을 가로막거나 미얀마의 재화를 약탈해 갔다. 직접 미얀마를 침략했던 일도 있었다. 그 시작은 18세기에 8년 동안 벌어진 청(清)·미얀마 전쟁이다.

1752년 버마족인 알라웅파야가 꼰바웅왕조를 세웠다. 꼰바웅왕조는 현재 미얀마 동남부에 살던 몬족을 몰아내고 영토 확장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1762년 꼰바웅군은 윈난(雲南)성을 침공했다. 이에 청나라는 정예 팔기군 1만여 명을 파견했다. 그러나 코끼리부대를 앞세운 꼰바웅군에 대패했다. 다만 윈난 각지의 수비군이 응전한 덕분에 꼰바웅군의 진격을 지금의 푸얼(普洱) 일대에서 막을 수 있었다. 정예 병력이 청군과의 전투에 투입되는 사이 꼰바웅왕조의 영토 확장은 중단됐다. 게다가 청조는 다시 2만 명의 정예 팔기군을 보냈다.

청군은 과거의 패전을 거울삼아 전략을 잘 짜 전투에서 승리했다. 꼰바웅왕조는 정예병이 청군과의 오랜 전투로 소진된 상황이라 전쟁을 더 이상 치르기 힘들어졌다. 이에 1769년 꼰바웅왕조는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청조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 주요 조공물은 비취 원석이었다. 막대한 비취가 미얀마에서 들어오자 청 황실과 귀족층 사이에서는 비취를 장신구로 착용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오늘날까지 비취가 중국 최고의 귀금속으로 각광받는 계기가 됐다. 중국인들이 미얀마에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던 것도 이 시기다.

중국인들은 미얀마에서 상점을 열어 비취 원석을 매입했다. 비취 원석을 마방을 통해 중국으로 운송한 뒤 윈난 국경도시에서 가공했다. 중국에서 가공한 이유는 세공기술을 미얀마인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완성품은 중국 전역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런 거래 패턴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1885년 미얀마가 영국 식민지가 된 뒤 더 많은 비취가 중국으로 유출됐다. 미얀마와 윈난 사이의 길을 ‘제이드 로드(Jade road)’라고 부를 정도였다. 자국 광석을 값싸게 가져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미얀마인의 불만은 그렇게 축적됐다.

 

중국, 미얀마 반군까지 꽉 잡고 있어 

자원 약탈뿐만 아니라 중국 군대가 미얀마에 쳐들어와 점거하는 일이 1950년에 벌어졌다. 1949년 장제스(蔣介石)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이끄는 공산당 제2야전군이 쓰촨(四川)성과 윈난성을 점령하자 청두(成都)에서 전용기를 타고 대만으로 탈출했다. 윈난에는 아직 투항하지 않은 수만 명의 국민당군이 있었다. 국민당군은 공산당의 공세를 피해 국경을 넘어 미얀마에 침입했다. 샨족이 사는 샨주와 카친족이 사는 와주였다. 1948년 미얀마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으나 혼란 상태였다. 우 누 총리가 이끄는 집권 AFPFL은 내분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동부 및 북부에 사는 소수민족들과 갈등이 심했다. 자국으로 침입하는 국민당 잔당을 격퇴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국민당 잔당은 미얀마 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미얀마군은 내부 전열을 정비한 뒤에야 총공격을 가해 적지 않은 지역을 탈환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낀 미국이 국민당 잔당을 지원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1951년 국민당 잔당은 미얀마군을 격퇴하고 윈난으로 진공하는 등 다시 세력을 넓혔다. 국민당 잔당의 운명이 조금씩 바뀐 것은 1954년부터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끝나자 더 이상 국민당 잔당을 지원하지 않았다. 결국 1954년 대만 정부는 미얀마에 있던 국민당군의 복귀를 결정했다. 문제는 적지 않은 국민당 장교와 병사가 대만으로 가지 않고 미얀마에 남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소수민족을 규합해 군벌이 되거나 기존 반군조직을 접수해 미얀마 정부에 대항했다. 1950년대 내내 국민당 잔당이 이끄는 소수민족 반군은 미얀마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에 미얀마 정부는 대만 정부에 계속 항의했다. 대만 정부는 남은 국민당 잔당에게 복귀를 명령했고 1961년 완전한 철수를 선언했다.

현실은 달랐다. 미얀마에는 여전히 많은 국민당 잔당이 있었다. 그들이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마약 덕분이다. 국민당 잔당은 미얀마를 침공한 직후부터 마약을 재배했다. 국경지대의 울창한 산림은 마약을 재배하기에 알맞았고 소수민족을 인부로 동원했다. 재배된 마약은 동남아의 상권을 잡은 화교에게 보내져 유통됐다. 1964년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다시 국민당 잔당을 찾았다. 국민당 잔당은 미 CIA와 협력해 라오스에서 비밀전쟁을 벌였다. 마약 재배지가 라오스와 태국까지 확대됐다. 이렇게 ‘골든 트라이앵글’이 완성됐다.

이 시기 골든 트라이앵글의 마약왕인 쿤사가 등장했다. 쿤사의 본명은 장치푸(張奇夫)다. 아버지는 중국인, 어머니는 샨족이다. 국민당 잔당이 운영하던 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아 장교가 됐다. 1963년부터는 독립 군대를 꾸려 군벌로 성장했다. 쿤사는 마약을 재배하고 무기를 밀매하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그 덕분에 1970년대에 샨족 독립운동 지도자로 등극했다. 1996년 쿤사는 미얀마군에 항복했으나, 군소 샨족 반군은 투항을 거부했다. 1960년대 말부터는 미얀마와 반목하던 중국도 개입했다. 자국 내 징포족(景頗族)과 동족인 카친족 반군을 지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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