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패권 정치’ 확산에 숨죽인 한국 정부
  • 장세정 중앙일보 논설위원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1.04.20 10:00
  • 호수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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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 정치 폐기, ‘21세기 홍위병’ 등장시켜 주변국 위협
“한국, 고슴도치식 무장하고 전갈처럼 비장의 독 품어야”

먼 훗날 역사가들은 ‘2021년 3월18일 알래스카 미·중 담판’을 어떻게 서술할까. 미국과 중국이 21세기 글로벌 패권을 놓고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쌍심지 돋우며 장군멍군 난타전을 주고받은 외교 전쟁의 날로 기록하지 않을까. 《초한지(楚漢志)》에  나오는 항우와 유방의 홍문연(鴻門宴)만큼이나 그날의 담판은 살풍경했다. 미·중 대표들은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알래스카 혈투’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말의 결투를 벌였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의 기세로 충돌했다. 홍문연 사건의 최종 승자는 유방이었다. 10년 뒤 알래스카 혈투는 누구의 승리로 끝날 것인가. 

홍문연같이 살풍경했던 알래스카 미·중 혈투

앤서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선공에 나섰다. 그는 모두발언에서 “(미국은) 신장·홍콩·대만, 그리고 미국에 대한 사이버 공격과 우리 동맹에 대한 경제적 압박 등을 포함한 중국의 행위에 대한 우리의 깊은 우려들을 논의할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중국의 이러한 행위들은 세계의 안정을 유지하는 원칙에 기반을 둔 질서를 위협한다”고 직설적 화법을 동원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중국의 양제츠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정치국원이 반격했다. 그는 “미국이 군사력과 재정적 우위로 다른 나라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중국의 아킬레스건인 인권 문제를 의식한 듯 “미국의 인권 상황이 최악”이라면서 “흑인들이 학살당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날 양측의 충돌 장면은 1시간 이상 전 세계에 고스란히 중계됐다. 총알과 포탄만 오가지 않았을 뿐 외교적 레토릭이 실종된 언어의 전쟁터였다. 미·중 패권 쟁투의 유탄 사거리 밖에 있는 국가들은 이런 광경을 흥미롭게 관전했을지 모르겠지만, 한반도처럼 지정학적 지진 지대에 놓인 국가들은 미·중 당사자들 못지않게 패권 다툼의 현장을 지켜보며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알래스카 혈투’는 1978년 말 덩샤오핑(1904~1997)의 개혁·개방 고속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현 중국 지도부의 자신감이 얼마나 팽배해 있는지, 그리고 내심 얼마나 기고만장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무엇보다 중국은 더 이상 미국의 일방적 공세에 과거처럼 호락호락하지 않겠다는 결기로 무장했음을 보여줬다. 실제로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은 올해 중국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68)이 제시한 중국몽(中國夢)이란 전략적 목표의 1단계 성공을 대대적으로 자축하고 그 성공을 국내외에 널리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상태다. 중국은 ‘2개의 100년(兩個百年)’이란 거시적 비전과 이정표를 설정하고 그동안 고속으로 질주해 왔다. 중국 지도부는 1921년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을 창당한 지 100주년인 올해 전면적 샤오캉(小康) 사회 건설 목표를 달성하고, 1949년 베이징에서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한 지 100주년인 2049년까지 부강·민주·문명·조화의 가치를 실현한 사회주의 현대화를 목표로 설정했다.

 

1958년 4000만 명 굶어죽던 중국, 2028년 “GDP 미국 추월”

중국은 공산당 창당 100주년인 올해 2개의 100년 목표 중에서 1단계 목표를 완수했다. 실제로 중국의 성과는 눈부시다. 중국의 국가 경제(GDP 기준)는 2010년 일본을 따라잡아 세계 2위로 올라섰고 2028년쯤 미국을 추월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19년 1만 달러를 돌파했다. 2011년 5000달러를 돌파한 지 불과 8년 만에 이뤄낸 기록이다. 지난 1월 시진핑 주석은 “절대빈곤을 탈출했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영국을 단기간에 추월하겠다며 마오쩌둥(1893~1976)이 동원한 대약진운동(1958~1960) 시기엔 4000만 명가량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런 중국에서 14억 명(78억 인류의 18%)이 모두 굶주림을 벗어났다는 선언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런 성과를 기반으로 중국은 올해 더 야심 찬 목표를 제시했다. 지난 3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최대 연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중국의 다음 비전을 공개하는 무대였다. 리커창 총리(66)는 업무보고에서 14차 5개년(2021~25년)계획과 2035년 중장기 비전을 제시하면서 “과학기술 집중 육성에 관한 ‘8대 산업’과 ‘7개 영역’을 선정했다”고 공개했다. 그는 “앞으로 5년간 매년 이 분야에 연구·개발(R&D) 자금을 전년 대비 7% 이상씩 늘릴 것”이라고 선언했다. “10년 동안 단 하나의 칼을 가는 심정으로 매진할 것”이라면서 “과학기술 종사자들이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부담을 확실하게 덜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의 강도 높은 압박과 제재가 몰아닥친 상황에서 과학기술과 핵심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홀로서기를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패권국 미국에 맞서 중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굴기(崛起) 전략이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고속 발전 성과와 경제적 성공을 자신의 1인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십분 활용하고 있다. 앞서 2018년 국가주석 연임 제한 규정(5년씩 2회)을 삭제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53년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자들의 거주지역)에서 태어난 태자당(太子黨) 계열의 시진핑 주석은 2023년 국가주석 3선 연임이 기정사실화되었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4연임, 5연임의 가능성도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사실상 종신 집권의 장애물이 없는 셈이다. 마오쩌둥 시대의 권력 1인 집중과 전체주의적 폐해를 없애기 위해 덩샤오핑이 구축한 합의제 방식의 집단지도체제는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왼쪽)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AP 연합

무더기 정적 숙청과 감시·처벌로 1인 전제 체제 구축

시 주석은 2012년 당 총서기 취임 이후 반부패를 내세워 저우융캉·링지화·궈보슝·쉬차이허우 등 당·정·군에 걸쳐 있던 반대 세력과 정적을 무더기로 숙청했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시자쥔(習家軍)’을 권력 요직에 광범위하게 포진시켰다. 이에 따라 후진타오 시대까지 구호라도 요란했던 당내 민주주의는 사실상 실종됐다. 공산당 내부의 반대 파벌과 일부 지식인의 불만을 차단하기 위한 집요한 감시와 처벌은 시진핑 권력 유지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마오쩌둥 시대를 연상케 할 정도로 사회주의 가치관 등 사상 학습을 강조하고 청년들에게는 애국주의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21세기 홍위병’으로 불리는 ‘펀칭(憤靑·분노한 청년)’을 대거 양성했다. 중화주의로 무장한 21세기 홍위병들은 맹목적으로 서양을 비판하고 중국이 우월하며 세상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외친다. 1990년대에 태어난 펀칭을 ‘샤오펀훙(小粉紅)’으로 구분해 부른다. 한류를 경험한 이들에겐 애국주의와 팬덤 문화가 뒤섞여 있다. 이들의 팬덤 대상은 시진핑과 중국이다. 홍콩 민주화 시위 때는 민주진영 인사들을 집단 매도하고, 대만엔 무력 공격도 불사해야 한다며 호전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코로나19의 중국 책임론도 그들은 부정한다. 

 뒤틀린 애국주의 광기를 대외적으로 여과 없이 분출하면서 중국과 중국인은 유럽과 아시아·미주 등 지구촌 곳곳에서 충돌하고 갈등을 키우고 있다. 가장 가까이서 피해를 보는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다. 중국의 관변 상업주의 매체인 환구시보(環球時報)는 한복은 물론 김치와 삼계탕이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문화 공정’을 전개하고 있다. 급기야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최근 “한국전쟁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라고 대놓고 역사 왜곡을 자행했다.

 

 “6·25는 미국이 침략한 것” 대놓고 역사 뒤집어

4월9일 중국공산당 산하 중국인권연구회도 “조선전쟁은 미국이 발동한 침략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의 역사 왜곡은 자국의 역사학자인 선즈화(沈志華)가 2016년 발표한 내용과도 어긋난다. 선즈화 화둥사범대 교수는 소련의 문서를 바탕으로 6·25가 북한 김일성이 주도하고 소련 스탈린이 승인한 남침전쟁임을 확인하고 마오쩌둥의 전쟁 참여에 대해 “아시아 혁명의 책임자를 자처한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특히 스탈린이 입장을 표명한 뒤에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아시아의 냉전》).   

 중국이 지금처럼 커진 몸집에 걸맞게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대국으로 처신하지 못할 경우 중국의 영향력은 대륙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입으로는 왕도(王道)를 떠들면서 행동은 패도(霸道)를 일삼는다면 어떻게 공감을 얻을 수 있겠나. 《역사의 관성》을 펴낸 옌쉐퉁(閻學通) 칭화대 교수는 “중국이 국제적 합의를 지키고 수행하는 것이 현대적 의미에서 왕도 정치 실행을 위한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고 주장했다. 《중국몽》의 저자 류밍푸(劉明福) 중국 국방대 교수도 왕도를 역설했다. 그는 “(중국은) 국력이 강해도 정복하지 않고, 자원이 부족해도 확장하지 않고, 다른 문명을 포용해 충돌하지 않는다. 만 년이 지나도 중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힘자랑하는 중국의 실상과 《중국몽》의 주장이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알 것이다.

 

민주·자유·인권·법치를 선택적으로 이용

중국공산당은 힘자랑을 하면 할수록 소프트 파워(설득과 매력)의 결핍을 드러내 국제사회에 거부감을 준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중국이 추구하는 가치가 국제사회에서 보편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는 사실이 중국공산당의 최대 약점이자 한계다. 민주·자유·인권·법치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중국 특색’이란 특수성 논리를 내세워 외면하거나 선택적으로만 이용한다면 그런 중국을 마음으로부터 좋아할 나라는 없을 것이다. 

 단지 세계 3위 수준의 핵 무력을 기반으로 항공모함을 여러 대 더 만들어 군사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중국이 진정한 강대국이 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글로벌 리더 국가로 도약하기에는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가 수두룩하다. 특히 소프트 파워 측면에서 중국의 국가 매력은 미국보다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 수준의 소프트 파워로 존경받는 글로벌 선도 국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다만 동북아, 동남아시아 지역의 패권주의 국가로 근육질을 과시하면서 공포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드 파워(무력과 강압)를 추구하는 중국공산당엔 어떻게 대응하는 게 바람직할까.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중국 다루기 방식은 일장일단이 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기반으로 쿼드(Quad, 미국·일본·인도·호주) 또는 쿼드에 한국 등이 참여하는 ‘쿼드 플러스’로 중국을 에워싸고 봉쇄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밖에서 압박하면 중국은 애국주의와 중화주의로 무장해 안으로 더 단단하게 단결하게 된다. 지금도 국내 통제는 더 강화되고 있고, 일부 지식인이 질식할 위기를 호소해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   

 줄탁동기(啐啄同機) 또는 줄탁동시(啐啄同時) 전략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달걀이 부화하려 할 때 알 속에서 나는 소리가 줄(啐)이다. 밖에서 알을 품은 어미가 그 소리를 듣고 껍질을 쪼아 깨뜨리는 소리가 탁(啄)이다. ‘줄탁’을 역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밖에서 압박하면서 동시에 중국 내부에서 공산당 체제에 맞설 세력을 우회 지원하는 것이다. 안팎에서 동시에 힘이 작동하면 천하의 중국공산당도 함부로 설치기 어려울 것이다. 

 명나라가 멸망할 무렵 만주족이 대륙을 차지할 때를 생각해 보자. 당시 만주족 팔기군이 산해관(山海關) 성문 철판을 밖에서 뚫은 것이 아니다. 안에서 오삼계(吳三桂, 1612~1678)가 호응했기 때문에 거대한 철문이 맥없이 열렸다. 중국을 제어할 비장의 힌트를 중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 “한국은 소국” 소중화 사대주의로 일관

그렇다면 중국의 급부상과 미·중 충돌 와중에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문재인 대통령의 2017년 중국 국빈 방문의 악몽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방중 직전에 ‘사드 3불(사드 추가 배치,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 편입, 한·미·일 군사동맹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허무하게 내주고도 ‘혼밥 외교’ 참사를 초래했다. 중국은 대국이고 한국은 소국이라는 발언으로 국격을 떨어뜨리고 국민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다. 지금도 일본을 걸핏하면 무시하면서 중국에는 유달리 저자세로 대하는데도 실제로 얻은 것이 없다. 지금도 시진핑 주석의 방한에 목을 매고 있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소중화 사대주의는 답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전략을 쥐락펴락해 온 인물은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다. 그는 문재인 정부 들어 국가안보실장으로서 외교 전략을 주도했다. 지난 4년 대중 외교 공과에 대한 책임은 문 대통령과 정 장관이 1차로 져야 한다.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 특보를 지낸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최근 “미국 편에 서면 한반도 평화를 담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신냉전을 막으면서 (한국의) 미·중 간 초월적 외교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문정인 이사장의 발언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신냉전의 힘의 대결 속으로 빠져드는 국제 현실을 간과한 초현실주의적 수사처럼 보인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것은 미·중이 전쟁을 치르지 않고 적절히 타협하고 화해하는 상태다. 하지만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은 그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 정부의 바람직한 대응 전략을 몇 가지 제시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무엇보다 돌고래 이상으로 몸집을 키우고 단단하게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 고슴도치처럼 자신을 보호할 자주 국방력 무장은 필수다. 만에 하나 함부로 건드리면 독을 뿜는 전갈 같은 비장의 무기를 품고 있어야 한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미·중 패권 다툼은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언제든지 닥쳐올 거대한 지정학적 재앙일 수 있다. 미리 대비하는 것 외에 다른 꼼수는 통하지 않으리라. 결국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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