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식 도시재생 가고 오세훈식 재개발 온다
  • 길해성 시사저널e. 기자 (gil@sisajournal-e.com)
  • 승인 2021.04.27 10:00
  • 호수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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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 등 도시재생 지역에서 재개발 요구 확산
서울시 “주민 원하면 공공·민간 재개발로 선회”

“1100억원을 도대체 어디에 썼는지 모르겠다.”

‘전국 1호’ 도시재생 지역인 서울 창신동에서 기자가 만난 주민들의 반응이다. 도시재생 사업은 철거보다 보존에 초점을 맞춰 주거지역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지역 특성을 살리는 정책이다. 서울의 대표 노후 주거지역으로 꼽히던 창신동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시절인 2015년 첫 번째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선정됐다. 지금까지 창신동에 투입된 도시재생 사업 예산만 1000억원이 넘는다.

6년이 흐른 지금 창신동의 도시재생 사업은 존폐 기로에 직면해 있다. 도시재생 폐지를 요구하는 주민이 늘어나고 있어서다. 주민들은 주거환경 개선이 미미할 뿐 아니라, 낙후 건물이나 골목이 보존되는 바람에 오히려 슬럼화가 심화됐다는 입장이다. 오세훈 시장 당선 이후 도시재생 지역에서 재개발로 선회하자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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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의 광명, 시흥 신도시 투기 의혹 논란이 지속되던 3월9일 서울 용산구 동자동 일대 건물 외벽에 공공주택 토지 강제수용 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다.ⓒ시사저널 최준필

“1100억원 투입했지만 주거환경 개선 미미”

창신동 주민들의 가장 큰 불만은 도시재생 사업을 했음에도 여전히 주거환경이 열악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기자가 찾은 창신동엔 현재 차 한 대가 지나가기도 어려운 골목길 양쪽에 허름한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골목 곳곳에서 정체불명의 악취가 진동했다. 방치된 빈집이나 폐가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삭막한 모습이었다.

도시재생의 마중물 역할을 하는 ‘앵커 시설(도시재생의 거점 공간 역할을 하는 시설)’도 주민 생활과 동떨어진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마중물사업 예산 200억원 중 78%가 앵커 시설 건립에 사용됐다. 현재 창신동엔 △봉제역사관(32억원) △산마루 놀이터(27억원) △원각사도서관(23억6000만원) △백남준기념관(14억원) △채석장 전망대(7억6000만원) △주민공동이용시설 4개소(65억원) 등이 있다.

산마루 놀이터 앞에서 40년간 공인중개사무소를 운영했다는 한 주민은 “이곳은 노인 비율이 60~70%에 달할 정도로 아이들이 없다. 누구를 위해 지어졌는지 모르겠다”며 “마을버스도 오지 않아 창신역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가파른 언덕길을 10분 이상 올라야 하는데 누가 오겠냐”고 토로했다. 이어 “다른 건축물들 역시 오로지 관광객들을 위한 조형물로,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행정의 결과물”이라고 지적했다.

창신동 도시재생 지역엔 2014년부터 최근까지 1168억3300만원에 달하는 예산이 투입됐다. 여기에는 마중물사업 200억원과 연계사업 607억3300만원, 별도사업(노후 주거지 거리 경관 개선) 61억원, 창신동 낙산근린공원 주차장 복합시설 조성사업 300억원 등이 포함됐다. 강대선 창신동 공공재개발추진위원장은 “도시재생 사업에 주민이 가장 원하는 도로 확장 및 마을버스 신설은 없었다”며 “1100억원이 넘는 금액 중 실제 도시재생에 사용된 것은 200억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어 “창신동의 주택 노후도가 72%에 달하는 상황에서 저런 건축물들이 주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떠나는 주민도 많았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창신동 인구는 2016년 4월 2만3358명에서 지난해 1월 2만873명으로 2485명(10.6%) 감소했다. 종로구 전체 동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이 줄어들었다. 창신동의 한 주민은 “주변이 슬럼화되다 보니 교육 등의 이유로 젊은 사람이 많이 떠나갔다”며 “지금은 중국·네팔·베트남 등지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와 유학생이 그 자리를 채우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도시재생 폐지를 요구하는 지역은 창신동뿐만이 아니다. 서울의 도시재생 지역은 총 52곳이다. 이 중 용산구 서계동, 성북구 장위11구역, 송파구 풍납동 등 창신동과 비슷한 처지의 도시재생지역 13곳이 ‘도시재생지역 폐지 및 재개발 연대’를 맺었다. 이들 지역은 공공재개발을 요구하고 있다. 연대는 지난 4월19일 국민의힘 소속 김소양, 이성배 서울시의원을 만나 도시재생 반대 서명과 각 지역의 현황을 전달했다. 이날 이들이 제출한 도시재생 반대 서명에는 △종로구 창신동 5765명 △용산구 서계동 3056명 △성북구 장위11구역 675명 등 총 1만331명의 서명이 포함됐다.

도시재생지역의 저조한 신축 주택 실적은 이들의 요구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서울시 산하 연구기관인 서울연구원이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도시재생지역 13곳이 첫 지정된 2015년부터 2019년까지 5년간 이곳의 신축 건수는 모두 822건에 불과했다. 신축 비율은 평균 4.1%로, 서울시 일반 저층주거지 신축 비율(6.1%)의 67%에 그쳤다. 30년 이상 노후 건축물 비율도 평균 59.2%에 달했고, 40년 이상 28.5%, 50년 이상 15.3% 등이었다. 서울연구원 관계자는 “창신·숭인, 상도 등 구릉지 지역에선 부분적으로 노후 빈집, 폐가 등 슬럼화하는 지역이 발생하고 있다”며 “1990년대 고밀 개발된 주거환경개선지구 일대에선 주차장 부족 등 열악한 기반시설로 주거지 주변 환경의 성능이 염려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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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예비후보가 2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권역별 정책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시사저널 박은숙

“도시재생 폐지하고 공공재개발로” 요구 커져

연대는 이번에 취임한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오 시장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도시재생 사업은) 예산 낭비이자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문재인 정부의 가장 큰 실수다. 시장으로 당선되면 박원순식 ‘벽화 그리기’ 도시재생 사업부터 손볼 것”이라며 전면 재검토를 시사했다.

실제로 오 시장 취임 이후 부처 간 무게중심이 바뀌는 분위기다. 오 시장은 서울시 도시계획·건설을 총괄하는 행정2부시장 자리에 류훈 도시재생실장을 내정한 데 이어 행정2부시장 산하 주택건축본부 인력을 확충하고 업무 재배정 등을 단행키로 했다. 이에 따라 박 전 시장 시절 덩치가 커진 도시재생실은 과 단위로 축소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도시재생지역 개발에 반대하던 서울시의 기조도 달라졌다. 서울시는 도시재생지역의 개발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서울시 관계자는 “공공재개발이든 민간재개발이든 주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도시재생 해제 절차를 밟아서 할 것인지, 재생지역 안에 할 것인지 법적으로 따지는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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