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어른의 품격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5.03 08:00
  • 호수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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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명 여배우는 그를 가리켜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나이를 떠나 가장 ‘쿨한’ 분”이라고 했다. ‘쿨(cool)하다’는 아무나 쉽게 들을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그것을 듣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과하지 않은 언행, 편견과 가식을 배격할 줄 아는 용기, 자신의 감정을 유연하게 조절해 내는 여유, 억지를 부리지 않으며 잘못했을 때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태도 등이 그런 조건에 속할 것이다.

그 여배우로부터 ‘가장 쿨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은 이는 윤여정 배우다. 연기자 생활 56년 차인 이 배우는 그가 일찍이 고백한 것처럼 “살기 위해” 연기를 시작해 하나같이 의미 있는 수상 이력을 차곡차곡 쌓아가더니 결국 세상이 부러워하는 그 자리에 가서 우뚝 섰다. 이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은 그의 인품과 연륜 그리고 오랜 노력이 어우러져 빚어낸 당연한 결과였다.

4월25일(현지 시각)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이 기자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AFP 연합
4월25일(현지 시각)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이 기자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AFP 연합

그의 오스카상 수상에 즈음해 또 하나 주목받은 것이 이른바 ‘윤여정 어록’이다. 요즘 젊은 층의 어투로 표현하자면 ‘쿨내가 진동’하고 위트 넘치는 말들이 그 어록에는 빼곡하다. “우리 너무 최고(最高)가 되려고 그러지 맙시다. 그냥 다 같이 최중(最中)만 되면 안 돼요?” 등등 새겨들을 만한 말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윤여정 배우가 그동안 했던 말들을 찬찬히 되돌아보면서 한 인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고 채현국 선생이다. 그는 탄광을 경영해 번 돈으로 유신 시절 핍박받던 운동권 인사들을 도와주고, 나중에는 효암학원을 맡아 후학 양성에 매진해 오다 얼마 전 안타깝게 타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SNS 등에 그의 어록이 회자되면서 “오랜만에 ‘참인간’을 접한 것 같다”는 등 뜨거운 반응이 쏟아졌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진 않았지. 노인 세대를 절대 봐주지 마라”라는 일침이 그가 세상에 남긴 여러 말 가운데 하나다.

어른에 대해서는 윤여정 배우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살면 된다. 어른이라고 해서 꼭 배울 게 있느냐?” “이 나이에 편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너희들이 뭘 알아?’라고 하면 안 되는 거다”라고. 고 채현국 선생이나 윤여정 배우나 모두 어찌 보면 나이 들어서도 ‘늙음’을 ‘낡음’으로 만들지 않은 어른들이다. 이른바 ‘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젊은이들 앞에서 무게 잡기는커녕 자기 세대인 어른들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알려주는 그들의 ‘쿨한’ 자세가 세상을 따뜻하게 감싸 안고 큰 울림을 남겼다. 윤여정 배우와 고 채현국 선생이 젊은이들에게서 호응을 얻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른이라고 함부로 나서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젊은 사람들을 친밀하게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지난 재보선 이후 정치권은 ‘이대남(20대 남자)’ ‘이대녀(20대 여자)’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야 한다며 20대 표심 분석에 여전히 매달리고 있다. 20대의 마음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간·쓸개라도 내주겠다는 듯 갖가지 성급한 논리와 아이디어를 절제 없이 쏟아낸다. 하지만 젊은 층의 마음을 붙잡는 데는 번드르르하고 거창한 게 따로 필요치 않다. 그들보다 앞서 태어나 일찌감치 많은 기득권을 차지한 어른들이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인지하고 그 책임에 걸맞게 품격 있는 언행을 평소의 활동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하면 된다. 잔꾀가 아니라 담담한 진심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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