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성공’ 양현종의 진짜 도전은 이제부터
  • 이창섭 야구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5.16 12:00
  • 호수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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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마이너 계약 때는 무모하다는 의견 지배적…불과 한 달 만에 MLB 승격해 선발 경쟁 나서

양현종(34)의 메이저리그 도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난 4월27일 텍사스 레인저스는 외야수 레오디 타베라스(22)를 내리고 양현종을 메이저리그로 승격시켰다. 개막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에 텍사스의 결정은 파격적이었다.

당시 텍사스 선발진엔 서서히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4월24일 데인 더닝(26)이 2.2이닝 5실점으로 무너진 데 이어 4월26일엔 아리하라 고헤이(28)가 2이닝 5실점으로 부진했다. 1선발 카일 깁슨(33)을 제외하면 제 역할을 하는 선발투수가 없었다. 선발진이 이닝 소화도 제대로 해 주지 못하면서 불펜진의 부담이 크게 늘어났다. 4월26일까지 텍사스 불펜이 기록한 89.1이닝은 메이저리그 전체 5번째로 많았다.

ⓒAFP연합

텍사스의 빠른 결단, 기회를 잘 살린 양현종

사실 텍사스 선발진의 이닝 소화력은 시즌 전부터 지적됐다. 랜스 린(33)이 떠나면서 더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됐다. 이에 양현종이 최적의 팀을 찾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텍사스는 양현종이 올라온 날 또 한 번 선발투수가 조기 강판됐다. 4월27일 LA 에인절스와의 경기에서 조던 라일스(30)가 2.2이닝 7실점으로 난타당했다. 두 번째 투수로 나온 양현종은 라일스와 대비되는 준수한 피칭을 펼쳤다(4.1이닝 2실점). 장타 두 방을 허용하면서 점수를 내줬지만, 메이저리그 첫 등판인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합격점을 받을 만했다. 경험이 풍부한 투수답게 경기 운영도 노련하게 이끌었다. 오타니 쇼헤이(26)는 양현종의 좋은 흐름을 깨뜨리기 위해 기습 번트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 기습 번트는 양현종의 메이저리그 첫 피안타가 됐다.

양현종은 5월1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도 호투를 이어갔다. 선발 아리하라가 2.2이닝 6실점으로 물러난 뒤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해 4.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5회초 선두타자 제이디 마르티네스에게 안타를 맞았지만, 무실점으로 이닝을 끝내는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양현종을 향한 텍사스의 믿음이 더 두터워질 수밖에 없었다.

텍사스는 양현종이 나온 경기에서 선발투수 두 명이 도합 5.1이닝 13실점을 했다. 반면 양현종은 8.2이닝을 2실점으로 막았다. 평균자책점으로 바꾸면 선발진이 21.95였고, 양현종은 2.08이었다. 피안타율 역시 선발진은 0.467에 달했고, 양현종은 0.188이었다. 비록 두 경기밖에 안 되지만, 기록에서 차이가 확연했다.

결국 텍사스는 5월6일 미네소타 트윈스전에서 양현종을 선발로 내세웠다. 스스로 선발 기회를 따낸 양현종은 텍사스에서 선발 데뷔전을 치른 최고령 투수가 됐다. 1회초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제압하면서 예사롭지 않은 출발을 보였다. 2회초 1사 후 홈런 한 방을 헌납했지만, 후속 두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3회초에도 탈삼진 두 개를 더한 양현종은 4회초 1사 만루에서 마운드를 내려왔다. 다음 투수 존 킹이 양현종이 남겨둔 승계 주자를 막아주면서 선발 데뷔전은 3.1이닝 1실점으로 마무리됐다.

양현종은 선발 데뷔전에서 탈삼진 8개를 쓸어담았다. 텍사스 역사상 3.1이닝 이하를 던진 선발투수가 삼진 8개를 잡아낸 것은 양현종이 처음이었다. 삼진 8개 중 5개가 체인지업(슬라이더 2개, 포심 패스트볼 1개)이었다. 양현종의 체인지업은 안정적인 제구와 탁월한 완급 조절로 미네소타 타선을 녹였다.

 

메이저리그에서 되살아난 명품 체인지업

실제로 현재 양현종의 호투 비결은 체인지업에 있다. 양현종은 포심 패스트볼 구위가 메이저리그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평균 구속 89.7마일(약 144.3km)은 올 시즌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 구속인 93.6마일(약 150.6km)보다 느리다. 포심 패스트볼만 두고 보면 메이저리그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힘들다.

하지만 체인지업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양현종의 체인지업에는 아직 타자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체인지업 피안타율이 0.143(14타수 2안타)에 불과하다. 타구의 질을 바탕으로 계산한 기대 피안타율(xBA)도 0.092로 공략하기 힘든 공이었다. 메이저리그 ‘스탯캐스트’는 투수의 구종이 득/실점에 얼마나 관여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지표를 제공한다. 양현종의 체인지업은 마이너스 2로 두 점 정도를 지켜준 공이었다.

체인지업은 던질 때 포심 패스트볼과 최대한 비슷하게 보여야 한다. 지난해 KBO리그에서 양현종의 체인지업이 흔들린 이유는 포심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이 던지는 과정에서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체인지업을 던지는 타이밍을 간파당했다. 이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 양현종은, 메이저리그 승격 후 포심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의 릴리스 포인트(공을 놓는 시점)가 다시 비슷해졌다. 타자들은 양현종이 던지는 공이 포심 패스트볼인지 체인지업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좌투수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우타자다. 그리고 체인지업은 우타자를 상대할 때 효과적이다. 양현종도 체인지업 51구 중 49구를 우타자에게 던지고 있다. 우타자에게 집중적으로 던진 체인지업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건 긍정적이다.

양현종의 성적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양현종이 첫 세 경기에서 상대한 에인절스와 보스턴, 미네소타는 모두 뛰어난 타선을 구축한 팀들이었다. 리그 평균에 비해 공격 생산력이 얼마나 좋았는지 판단하는 조정득점생산력(wRC+)에서 보스턴은 전체 1위(115), 에인절스는 4위(111), 미네소타는 6위(107)에 올라 있다. 양현종은 이 세 팀을 상대로 12이닝 3실점으로 선방했다. 향후 어떤 팀을 만나더라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 텍사스는 양현종의 보직을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다. 아리하라가 손가락 부상으로 선발진에서 이탈했지만, 현지에서는 양현종 대신 웨스 벤자민(27)이 선발진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한다. 벤자민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텍사스가 키워야 하는 투수다. 이번 시즌 리빌딩이 목표인 텍사스는 가급적 젊은 투수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하지만 양현종이 불펜에서 계속 좋은 모습을 이어간다면 선발진에 전격 합류할 수도 있다.

올해 초 양현종이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을 때 무모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양현종은 보란 듯이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았고, 선발진 경쟁에 나서고 있다. 향후 어떤 성적을 기록할지, 어떤 결과를 보여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양현종은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모두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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