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전80기’ 끝에 마침내 ‘PGA 챔프’ 꿈을 이룬 이경훈
  • 안성찬 골프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5.23 12:00
  • 호수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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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훈, 안정적 투어 담보된 한·일 뒤로하고 미국 도전
5년 만에 ‘8번째 PGA 챔피언’ 등극

‘예비 아빠’의 힘은 강했다. 7전8기도 아니고 무려 ‘79전80기’ 끝에 우승한 이경훈(30)이 미국에서 한국 프로골퍼의 마침표를 찍었다. 현재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활약하는 8명의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이경훈만 우승이 없었던 터. 그런데 5월17일(한국시간) 이경훈이 그 꿈을 이뤘다.    

이날 선두와 1타 차로 출발한 이경훈은 PGA투어 AT&T 바이런 넬슨 최종일 6타를 줄이며 합계 25언더파 263타를 쳐 샘 번스(미국)를 3타 차로 제치고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우승상금은 145만8000달러(약 16억4000만원)다. 미국에 진출한 지 5년, 2018~19 시즌 정규투어에 합류한 지 80개 대회 만에 첫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아내 유주연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마지막 18번홀(파5)에서 아이언샷으로 투온시켜 이글 찬스를 만든 뒤 첫 퍼트를 핀에 붙여 버디를 잡아내며 우승을 확정했다.

5월16일(현지시간) 이경훈과 만삭의 아내 유주연씨가 미국 텍사스 맥키니 TPC 크레이그 목장에서 열린 AT&T 바이런 넬슨 대회에서 우승한 후 트로피 옆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AFP연합

직장 그만두고 로드매니저 자처한 아내, 우승 함께 만들어

너무 감격스러웠던 그는 특별한 세리머니를 하지 않고 동반자들과 축하 인사를 나눈 뒤 ‘만삭인 아내’와 행복한 포옹을 했다. 그가 미국에 진출하면서 아내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로드매니저를 자처했다.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며 함께 우승 영광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내와 거의 모든 대회를 다 같이 다니는 것이 정말 좋죠. 그런데 지금은 배가 많이 나와서 앞으로 한두 대회 정도 지나면 집에서 안식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곧 아이 엄마가 되는 아내를 지켜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꼭 아빠가 된다는 것 때문에 잘해야겠다는 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남자로서 강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내에게 무엇보다도 고맙죠. 우리 부부에게 7월이면 딸이 태어납니다. 정말로 큰 선물이죠. 이번 우승도 아이에 대한 축복인 것 같습니다. 사실 아내가 아이를 임신하고, 정말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고, 감사한 일도 무척 많았습니다.”

이경훈의 골프 입문은 조금 독특하다. 한국의 주니어 선수들이 대부분 부모나 지인들의 권유로 시작하는데, 그는 13세 때 또래에 비해 비만해 ‘살을 빼려고’ 클럽을 잡았다. 그런데 숨어 있던 재능이 나타났다. 원래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은 골프보다는 목소리가 좋아 성악가나 가수가 되려고 했다. 취미도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골프를 하면서도 연습 시간을 빼놓고는 노래를 곧잘 부른다.

그는 주니어 시절부터 기량이 뛰어난 유망주였다. 2008년 국가 상비군에 이어 2009년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대학은 한국체육대학에 진학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고, 11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에 입회했다. 국내에서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일본을 노크했다. 2011년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퀄리파잉스쿨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2012년 JGTO 나가시마 시게오 인비테이셔널 세가 사미컵에서 우승했다.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먼저 우승한 것이다. 2015년 JGTO 혼마 투어월드컵에서 정상에 오르며 일본에서 승수를 추가했다. 한국에서는 2015년과 2016년 코오롱 한국오픈에서 2연패를 달성했다. 특히 2015년 3개 대회에 출전해 상금 3억1560만원을 획득해 KPGA투어 상금왕에 올랐다.

이경훈은 곧바로 미국에 도전했다. 그가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이유는 딱 한 가지,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샷 대결을 해 보고 싶어서”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2016년 PGA 2부 콘 페리투어로 발길을 돌렸다. 콘 페리투어는 PGA투어로 가는 길목이었다.

생각대로만 된다면 누가 도전하지 않겠는가. ‘좁은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우승 없이 3년간 인고(忍苦)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첫해가 최악이었다. 18개 대회에 출전해 8개 대회밖에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상금으로 손에 쥔 돈은 고작 5000달러. 조건부 시드여서 일단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오픈에 출전해 우승했다. 다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PGA투어에 ‘뼈를 묻자’는 각오로. 그러면서도 그는 얄팍한 지갑을 털어 ‘이경훈’ 이름을 걸고 한국에서 서울시골프협회와 함께 주니어골프대회를 열고 있다.

꿈의 무대인 마스터스 내년 출전 티켓도 확보

그는 주니어 시절 함께 골프를 한 친구의 외사촌 누나 유주연씨와 지난 2018년 12월 결혼했다. 아내의 정성스러운 뒷바라지 덕에 2018년 콘 페리투어에서 상금랭킹 5위에 오르며 또 하나의 산을 넘었다. 그런데 PGA투어에 합류하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빛은 보이지 않고 더욱더 어둠의 늪에 빠져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첫 시즌에는 3위 한 번을 포함해 톱 25위에 든 것이 겨우 다섯 번이었다. 13번이나 컷오프 탈락했다. 코로나19가 강타한 2019~20 시즌도 마찬가지였다. 컷 통과 13번, 컷 탈락 12번이었다. 우승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돼 버린 것이다.

175cm, 80kg의 그는 장신과 장타자가 우글거리는 PGA투어에서 평범해 보인다. 그가 올 시즌 낸 기록을 보면 더욱 실감이 난다. 드라이브 평균거리 296.9야드(95위), 페어웨이 안착률 60.35(99위), 그린적중률 64.35%(139위), 샌드세이브 52.94%(73위), 평균타수 72.255타(104위), 평균퍼트수 28.59타(49위)다. 이런 수치만 보면 우승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런데 유독 이번 대회에서 ‘확’ 달라진 경기를 했다. 마치 ‘그분이 오신 날’처럼. 드라이브 평균거리 291.9야드(72위), 페어웨이 안착률 66.07%(81위), 그린적중률 80.56%(5위), 그린적중 시 홀당 평균퍼트수 1.603타(6위), 샌드세이브 100%(1위), 온 그린에 실패했을 때 그린 주변에서 파세이브 이상을 나타내는 스크램블링 78.57%(24위)를 기록했다. 특히 아이언샷의 정확도를 나타내는 그린적중률이 높아진 데다 퍼터를 바꿔서 나온 것이 톡톡히 효과를 봤다.

“이번 대회에서 무엇보다 아이언도 잘 떨어졌습니다. 다만, 몇 달 동안 퍼트가 말썽을 부렸죠. 변화를 모색하려고 퍼터를 교체해 출전했습니다. 원래는 말렛형을 쓰다가 이번에 캘러웨이 일자 앤서 타입으로 바꿨는데, 그게 정말 원하는 대로 홀에 떨어져주면서 우승의 큰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번 우승은 이경훈에게 특별하다. 2023년까지 투어카드를 받은 데다, 5월21일(한국시간) 개막한 PGA투어 메이저대회 PGA 챔피언십 출전 자격을 얻었고, 내년 꿈의 무대인 마스터스 출전 티켓도 확보했기 때문이다. 또한 총상금 252만3153달러를 획득해 단숨에 상금랭킹 29위, 페덱스컵 포인트 930점으로 페덱스컵 랭킹 29위에 올랐고, 세계랭킹도 137위에서 59위로 껑충 뛰며 도쿄올림픽 출전 희망을 부풀렸다. 

이경훈에게는 남은 시즌 두 가지 목표가 있다. 한 시즌을 마무리하는 페덱스컵 플레이오프 출전이다. 페덱스 랭킹 30위 이내에 들어야 최종전에 나간다. 또한 스폰서를 해 주고 있는 PGA투어 CJ컵에서 반드시 우승하는 것이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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