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은 왜 재벌 ‘가족경영’을 화두로 던졌나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07.28 10:00
  • 호수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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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재계의 새로운 화두 ‘가족경영 2.0’
오너와 전문경영인 체제 두고 때아닌 ‘갑론을박’

“대기업 가족경영을 놓고 논란이 많지만, 전문경영인 체제도 문제가 있습니다.” 

재계 리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이 최근 대기업 가족경영 체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나섰다. 대중 소통 행보의 일환으로 치부하기엔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인 데다, 대선을 목전에 두고 나온 발언이라 이목이 집중됐다. 최 회장은 왜 이 시점에 가족경영이란 화두를 들고나왔을까. 

최 회장은 7월10일 대한상의 주최로 열린 간담회에서 대기업 그룹 승계 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작심한 듯 의견을 쏟아냈다. 그는 “승계에 관해 가족경영이 나쁘다는 지적을 많이 받고 저 역시 자유롭지 않다”면서도 대안 격인 전문경영인 체제는 리스크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사실상 국내 대기업 경영 체제의 주된 형태인 가족경영을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6월2일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 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부터) 등 4대 그룹 대표가 문재인 대 통령과의 간담회를 위해 청와대 상춘재로 향하고 있다.ⓒ연합뉴스

20대 그룹 대부분 ‘공고한 가족경영’ 

최 회장이 “우리나라도 차차 (해외 선진국처럼)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될 것으로 본다”고 부연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시사저널이 국내 20대 그룹의 경영 체제를 분석해본 결과, 포스코·농협·KT를 제외한 17곳이 모두 오너가 있는 기업이었고, 이 중 14곳은 가업 승계를 한 가족경영 체제였다. 나머지 3곳 가운데 현대중공업그룹의 경영권은 전문경영인인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 회장이 보유했고, 카카오그룹(김범수 이사회 의장)과 미래에셋그룹(박현주 회장)은 아직 창업자가 이끌고 있다. 

가족경영 체제의 기업 중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는 곳은 없어 보인다. 오너가 있는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전문경영인 체제인 현대중공업마저 조만간 다시 정몽준 대주주의 장남 정기선 부사장이 경영권을 이어받을 전망이다. 가족경영 체제로 회귀하는 것이다. 카카오도 김 의장이 자녀로의 승계를 준비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에 휩싸였다. 김 의장의 아들 상빈씨와 예빈씨가 지난해 김 의장이 지분 100%를 보유한 비상장 회사 케이큐브홀딩스에 입사하면서다. 총수가 “자녀에게 경영권 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밝힌 미래에셋그룹과 삼성그룹도 뚜껑을 열어보기 전엔 경영 체제 전환을 단언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최 회장의 가족경영 체제 변호에 갑론을박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세형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재벌개혁본부 팀장은 “경제단체 수장으로서 분명 적절치 않은 발언이다. 마치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재벌정책과 관련한 시그널을 주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오 팀장은 “우리나라 재벌그룹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 전문경영인의 역할 설정 등이 미비한 실정”이라며 “3~4%, 많아봐야 10%의 지분율로 독주와 전횡을 일삼는 오너의 황제경영은 앞으로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경제구조에서 더 이상 가족경영 체제를 부정하고 밀어내긴 어렵다는 현실론도 있다. 전봉걸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 주도로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 등이 모범답안인 양 종용해선 안 된다”면서 “개별 기업이 스스로 경영·사회 환경 변화에 순응하며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두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규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기업이 생기면 사후적으로 제재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최 회장이 가족경영 체제의 장점을 주장하며 든 주요 논거는 해외 사례다. 그는 “국내 기업은 역사가 짧은데, 경영 체제 논란은 이미 해외에서 마찬가지로 불거진 바 있다”며 “미국 대기업의 경우 창업주부터 2·3대로 내려갈 때 많은 문제가 야기됐다. 그런 과정을 거쳐 상당 부분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됐으나, 여전히 가족경영이 꽤 많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일본에서도 한국의 가족경영을 부러워하는 분위기라고 최 회장은 전했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가 일본 반도체 기업 도시바에 투자한 사례를 들며 전문경영인 체제의 단점을 꼬집었다. 그는 “도시바 매각 이슈가 발생했을 때 일본 정부까지 관여했지만, 일본의 대기업 중 어느 곳도 인수전에 뛰어들지 않았다”며 “일본에 큰 위험 부담을 감내하고 반도체 회사를 경영할 만한 전문경영인이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경영 체제의 SK는 강력한 오너십으로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어필한 것이다. 

이에 이한상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는 “해외직접투자액을 보면 일본이 2017년부터 한국을 앞서왔다. 환율 등 외부 변수도 없진 않았지만, 뼈를 깎는 지배구조 개선이 주효했다”며 ‘한국의 가족경영이 일본의 전문경영인 체제보다 낫다’는 취지의 최 회장 발언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부정적인 여론을 감안하면서도 최 회장이 가족경영 체제를 변호한 것은, 그만큼 해당 이슈가 재계의 화두라는 방증이다. 세대교체기를 맞은 재계는 승계, 지배구조 개편 등 이슈와 경제 패러다임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배구조 개편 속도 내는 재계 

당장 최 회장이 이끄는 SK그룹부터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SK텔레콤은 지난 4월 AI&디지털인프라 컴퍼니(SKT 존속회사)와 ICT투자전문회사(SKT 신설회사)로 인적 분할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SK텔레콤 인적 분할의 핵심은 기업 가치 제고다. SK텔레콤은 이번 인적 분할로 통신 사업과 신성장 사업을 분리해 인공지능(AI)과 디지털 인프라 등 혁신 기술 개발에 적극적으로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SK는 SK㈜→SK텔레콤→SK하이닉스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갖추고 있다. 최 회장은 SK㈜ 지분 18.29%를 보유했다. SK(주)는 앞서 이사회 고유의 감시·견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대표이사로 제한돼 있던 이사회 의장 자격 요건을 2019년 폐지했다. 현재 SK(주) 이사회 의장은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이다. 

SK는 더 나아가 각 계열사 이사회에서 전문경영인을 평가하고 연임 여부도 결정하게 했다. 총수가 인사 권한을 내려놓은 것은 파격 중 파격으로 꼽힌다. 대외적으로 입장을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지배구조만 보면 최 회장이 아예 손을 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도 높은 조처”라며 “그럼에도 여전히 최 회장이 그룹 내에서 절대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점, 세 자녀가 모두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점, 최근 발언 등을 감안하면 가족경영 체제를 포기할 일은 없을 것 같다”고 평가했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지배구조 개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비상장 건설사 현대엔지니어링은 연내 코스피 상장을 목표로 기업공개(IPO)를 추진 중이다. 정의선 회장이 현대엔지니어링 상장으로 확보한 현금으로 현대차나 현대모비스 지분 매입에 나서며 지배구조를 단순화하고 복잡한 순환출자 고리를 끊으리란 게 재계 안팎의 관측이다. 

 

“어떤 경영 체제가 더 낫다고 할 순 없어” 

한화그룹은 향후 김승연 회장 세 아들로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세 아들이 지분 100%(장남 동관 50%, 차남 동원·삼남 동선 각 25%)를 보유한 에이치솔루션에 관심이 쏠린다. 에이치솔루션은 한화에너지의 지분 100%를 갖고 있고, 한화에너지는 한화솔루션과 함께 한화종합화학을 지배하고 있어 사실상 또 다른 지주사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방점이 주주·기업 가치 제고보다 승계에 찍힌다면 허울뿐인 지배구조 개선일 뿐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한상 교수는 “일부 대기업은 멀쩡한 회사도 분사해 상장시킨다”며 “일본 기업들은 과거 그런 과정을 거쳤더라도 다시 상장 폐지하는 등 엄청난 개혁을 단행하고 있다. 이게 최근 ‘바이 재팬(Buy Japan)’의 포인트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오너 아니면 전문경영인’이라는 경영 체제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이 교수는 언급했다. 지배 주주이면서 경영진에는 속하지 않고 이사회 의장으로 빠지거나, ‘숨은 오너’로 활동하는 재벌이 많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경영자의 능력에 관해선 “그간 창업자가 전문경영인보다 유능한 건 팩트였으나, 2세 이후로 넘어갈수록 결과는 천차만별이었다”며 “결국 어떤 경영 체제가 옳으냐에 대한 답은 ‘검증된 사람이 경영을 맡아 좋은 성과를 내면 좋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도 “가족경영이나 전문경영인 체제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얘기하긴 어렵다. 오너든 전문경영인이든 주주의 이해관계와 기업 가치 향상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똑같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며 “결국 문제의 본질은 오너십이라기보다 기업 지배구조가 제대로 갖춰져 있느냐”라고 강조했다. 

 

신세계, 20년간 자산 성장률 30대 그룹 중 가장 높아  

KT·금호아시아나·한진, 100% 이하로 최하위권 

국내 30대 그룹 가운데 지난 20년간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나타낸 곳은 신세계였다. 기업평가 사이트 CEO스코어 조사에 따르면,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신세계그룹의 자산 성장률은 1340.8%로 30대 그룹 중 수위를 차지했다. 신세계의 공정자산 총액은 2000년 3조2210억원에서 2020년 46조4090억원으로 늘어났다. 

부영(1009.5%)과 CJ(628%), 농협(636.4%), 롯데(605.5%), 현대자동차(581%), 삼성(554.5%), 한화(534.1%), 현대중공업(518.1%), 미래에셋(472.3%), SK(405.6%) 등의 그룹도 2000년 이후 5배 이상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30대 그룹의 평균 자산 성장률은 388.2%였다. 가장 낮은 KT(22.3%)를 비롯해 금호아시아나(50.3%), 한진(57.7%), S-Oil(104.4%), 네이버(105.4%), 셀트리온(153.7%), 두산(165%), 효성(168.3%), 한국투자금융(173.8%), LG(191.2%) 등은 성장률이 평균 이하였다. 

한편 30대 그룹 중 오너가 없는 기업은 포스코, 농협, KT, S-Oil 등 4곳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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