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하다’의 외교적 의미
  • 이수민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8.05 12:00
  • 호수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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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메르켈의 미·중 사이 줄타기 외교
우유부단하거나 혹은 영리하거나

독일 서부가 홍수로 인해 사상 최대 사상자를 낳고 있을 때, 독일의 수장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이뤄진 방문이라 미국에 일종의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는 것이 주된 해석이었다. 그렇다고 메르켈을 친미파 정치인으로 분류할 순 없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미국과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해왔다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다.

독일에는 ‘메르켈하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무슨 일이 닥쳤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 혹은 한쪽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불명확하게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 국민이 바라본 메르켈의 정치 스타일로부터 비롯된 말이다. 메르켈의 ‘메르켈함’은 외교에서도 그대로 발휘된다. 실제로 독일은 국제 정세에서 애매한 위치에 있다. 주요 강대국에 속하기는 하지만, 나라의 경제가 대부분 수출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타국과의 관계 유지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미국·중국과 똑같은 방식으로 외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만은 없다.

ⓒEPA 연합
ⓒEPA 연합

‘반중’ 유럽연합에 속하며 중국과 교류하는 법

최근 독일은 중국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해졌다. 중국이 독일의 네 번째로 큰 수출시장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과 마냥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엔 다소 어려운 지점이 있다. 독일 국민은 자국의 이익과 무관하게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환경이나 인권 문제에 대한 의식 수준이 상당히 높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인들은 러시아나 중국처럼 인권 유린에 대한 보도가 심심찮게 들리는 나라들엔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외교에서 늘 아슬아슬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곤 한다.

보수 성향의 언론이라고 평가받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진보 언론 ‘타게스슈피겔’은 공통적으로 반중 정서를 내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강한 미국’을 주장하고, 후자는 ‘독일의 자주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강한 미국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한동안은 ‘강한 미국이 있어야 자유로운 유럽이 가능하다’를 모토로 삼아야 하며 중국의 빠른 경제성장에 맞서기 위해서는 미국과 유럽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중국의 전체주의가 더욱 위세를 떨칠 것이고 군사력이 강화돼 독일을 위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자주적 독일’을 강조하는 편에서는 미국이 중국을 막아낼 만한 강력한 동맹국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메르켈은 서구 사회의 가치에 대한 회의가 짙기 때문에 이미 중국과의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증거로 타게스슈피겔은 메르켈의 전기를 쓴 작가의 말을 인용했다. 그에 따르면 메르켈은 ‘자유를 긍정하는 시스템은 살아남을 수 없으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궁극적으로 너무 약하다’고 말했다. 즉 메르켈은 현재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끊을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믿고 반중 외교를 펼칠 정도의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결국 중국을 이길 수 없으니 중국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웬만하면 하지 않겠다는, 다소 패배주의적인 경향도 메르켈에게서 보인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또 다른 진보 성향 매체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흥미로운 사실을 부각시킨다. 독일의 관점에서 미국과 중국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미국과 중국이 각자 유럽 국가들을 필요로 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 6월 바이든의 첫 해외순방이 유럽 위주였고, 그때 유럽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견고히 하려는 의도가 컸다는 점을 든다. 중국 역시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그리고 메르켈이 지난 4월에 이어 불과 3개월도 지나지 않아 7월5일 다시 영상회의를 진행했다.

해당 언론은 ‘중국과 독일 간의 외교를 논할 때 ‘유럽연합’이라는 제3의 요소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이라는 개별국이 중국에 우호적인 외교정책을 펼친다고 해도, 독일은 유럽연합 회원국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중국의 인권 탄압 문제를 이유로 EU-중국 투자협정을 동결시키고 중국에 제재를 가하는 등 독일과는 확연히 다른 기조를 보이고 있다. 이에 시진핑은 유럽연합의 제재를 받더라도, 독일과 프랑스만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면 괜찮다는 의중인 것으로 언론은 해석하고 있다.

ⓒAP 연합·XINHUA

미국과 동맹하며 러시아와도 협력하는 법

최근엔 독일 외교에서 러시아 역시 매우 중요한 국가로 꼽힌다. 근래 들어 ’노드스트림2‘가 미국의 비준을 받았다는 뉴스가 독일 언론을 도배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에서 독일까지 이어지는 가스관을 칭한다. 독일 슈뢰더 내각 당시 이미 계약이 체결됐으나 미국의 반대로 지속적으로 언론의 도마에 올랐던 프로젝트다. 미국은 표면적으로 러시아와 같은 비윤리적인 국가와 경제 교류를 할 수 있느냐며, 러시아의 가스를 수입하겠다는 독일을 꾸준히 비판해 왔다. 하지만 그 내면엔 독일이 노드스트림2를 포기하고 자국의 셰일가스를 더 비싼 가격에 수입하길 바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의도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역시 러시아의 석유를 일평균 약 54만 배럴 수입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미국의 반대가 없으니 노드스트림2는 아무 문제 없이 실현될까. 이에 대해 독일 경제지 ’한델스플라트‘는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라며 유럽연합의 반대에 부닥칠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다음 내각의 큰 숙제는 바로 노드스트림2에 따른 정치적인 대가를 치르더라도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를 숙고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메르켈의 외교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이다. 헛된 희망을 품거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16년 동안 독일 총리를 지내면서 그는 여러 명의 미국 대통령을 거치고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지켜봤다. 그 결과 그가 택한 태도는 그 누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유럽연합의 결속력을 강조하면서도 유럽연합이 제재하는 중국과 경제적 수교를 이어나가고, 미국과의 동맹을 끊지 않으면서도 러시아에서 독일까지 이어지는 가스관 공사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메르켈하다‘는 그의 우유부단을 비꼬며 만들어진 말이지만, 어쩌면 아슬아슬한 줄 위에서 가장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고도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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