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구성하는 감성의 골든 레코드를 만나다
  • 조창완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8.01 11:00
  • 호수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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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문학성 지닌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 《밝은 밤》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344쪽 | 1만4500원》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344쪽 | 1만4500원》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삶에서 멍투성이 같은 시간이 있다. 이혼 후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간 희령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지연은 우연히 외할머니를 만나 그녀가 잉태한 근원의 시간으로 찾아든다. 4대를 연결하는 지연네 가족사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부터다. 역 앞에서 고구마를 파는 어린 여자가 정신대로 끌려갈 것을 예감한 증조부는 그녀를 채근해 결혼한다. 그런데 증조모는 당시까지만 해도 천시받던 백정의 딸이었고, 증조부는 그런 시선을 피해 개성으로 가서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족쇄는 쉽게 벗겨지지 않고, 1939년 태어난 할머니에게까지 ‘백정의 딸’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런데 위태위태한 증조모의 곁에는 새비 아주머니 부부가 있었다. 두 가족은 일제, 한국전쟁 등 곡절의 시간을 근근이 버텨가면서 개성, 대구, 희령으로 이어지는 이주사를 채워간다.

증조부와 증조모,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 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저자가 찾는 가장 확실한 키워드는 증조모가 할머니에게 했던 “기런데… 아니야. 너를 귀하게 대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상대를 귀하게 대한다는 말은 이곳에서 가장 깊게 파고들고, 소설에서 부부라는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큰 키워드가 된다.

실제로 할머니는 자신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할아버지로 인해 그간 깊은 정을 느꼈던 이들과 연결을 끊어간다. 그리고 1959년 9월 엄마를 낳는다. 내 엄마 미선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전쟁 전 할아버지와 결혼해 아들 낳고, 시부모 모시고 살았다는 할아버지의 본처가 찾아온다. 할머니는 악다구니를 하지 않고, 속초로 떠나는 할아버지를 지켜만 본다. 호적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는 할머니와 어머니는 데면데면한 삶을 살다가, 스무 살에 엄마가 도시로 떠나면서 더 멀어진다.

소설은 지연이 희령에서 할머니와 소통하면서 얻어가는 4대 간 100년의 터울에서 감정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에서 남자들의 존재는 최대한 감추고, 여자들의 전승을 통해 그들이 가진 감정의 지금 상태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쇼코의 미소》를 통해 여성 노마디즘을 구현했던 작가는 중단편소설 《내게 무해한 사람》을 거친 후 이번에 처음 장편소설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역시 선이 굵은 작가답게 전체의 얼개도 충분하고, 심정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문장들을 통해 독자들을 몰입하게 한다.

천문대 연구원이라는 독특한 직업이 주는 매력을 바탕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와 서정적이며 사려 깊은 문장,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뜨거운 문제의식이 이 소설에서도 빛난다. 참고로 골든 레코드는 인류에게서 가장 멀리 이동한 보이저 1호에 실린 지구의 다양한 기록을 담은 저장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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